산은·우리 등 2개은행서 '기업채무관리 73%' 담당 전문가들 "리스크 집중 위험 … 민간 이양 바람직"
국내 은행들의 기업금융 기능 상실은 지나친 정부주도의 채권 관리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사실상 정부가 기업 구조조정을 도맡다 보니 민간 은행의 기업금융 기능은 자연히 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27일 현재 기업 구조조정이나 채무 평가 등 기업금융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곳은 정책금융기관인 KDB산업은행과 정부가 최대 지분을 소유한 우리은행 정도다.
금융감독원의 주채무계열 명단에 따르면 전체 41개 계열 중 우리은행이 삼성, LG, 두산 등 16개 계열의 주채권은행을 맡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어 KDB산업은행이 한진, 대우조선해양, 금호아시아나 등 14개 계열의 주채권은행이다. KEB하나은행은 현대자동차 등 5개 계열이며 신한은행은 롯데 등 4개 계열을 맡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신세계와 KT 2개 계열만 맡았다. 사실상 정부가 키를 쥐고 있는 은행 두 곳에서 주요 기업 채무관리의 73.17%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주채무계열에 지정되지 않은 기업까지 합산하면 정책금융의 채권관리 비중은 훨씬 늘어난다는 것이 업계의 전언이다.
정책금융기관에서 기업 구조조정을 도맡다 보니 민간 은행의 기업금융 기능은 자연히 퇴화하고 있다. A은행 기업금융 담당 임원은 "기업과 주거래 계약을 맺고 대출을 하고 외환, 사모사채 등 다양한 기업 금융을 하고는 있지만, 실상 이러한 업무가 기업금융의 본질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는 어떻게 보면 기업과 거래하는 '거액'의 소매금융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은 지난 1997년 IMF 구제금융 때 처음 시작됐다.
당시 금융감독위원회 산하로 구조개혁기획단을 편성, 운영한 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쳐 정부의 기업금융 역할은 되레 강화되고 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우리은행 매각은 물론,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까지 민영화하려고 했지만 현 정부 들어 이 같은 기조는 정 반대가 됐다.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금융위원회는 지난 10월 22일 '기업 구조조정 전문회사(이하 유암코) 설립 운영방안'을 발표하면서 민간 은행의 기업금융 기능이 약화됐으니 유암코 확대 개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손병두 금융위 금융정책국장은 설립 방안에 대한 기자 브리핑에서 "금융자금뿐만 아니라 회사채 등 시장 자금 조달이 늘어나면서 채권은행의 역할이 축소되고 은행들의 추가대출 기피 등 채권은행 주도 구조조정에 어려움이 있다"면서 "금융감독원의 채권단 간 이견 조정 역할마저 위축돼 전문회사 설립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조사결과 국내 좀비기업 급증에는 은행의 과도한 대출과 만기 원금회수 기피가 오히려 작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민간 은행이 대출을 해 주지 않아 구조조정 회사를 따로 설립하겠다는 당국의 설명과는 배치되는 부분이다.
금융위는 새로이 개편된 유암코가 '민간 주도 구조조정 회사'라고 수차례 강조했지만 당초 계획대로 민영 회사로 설립된 것이 아닌, 기존 유암코의 기능 확대에 그쳐 사실상 정부 주도 구조조정 회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 유암코의 구조조정 본부장은 우리은행 출신이고 주요 경영진은 산업은행에서 임명됐다.
산업은행과 우리은행에 이어 전문회사라는 유암코까지 존재하는 마당에 민간 금융회사가 기업의 채무 관리에 나설 까닭이 없다.
B은행 기업 구조조정 담당 임원은 "최근 수년간 초저금리 기조로 수익성 압박이 심한 상황에서 채권 은행으로서 기업금융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데는 상당한 부담이 있고, 이미 정책금융기관이 이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민간 은행의 기업금융 필요성이 낮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정책 전문가는 "기업 금융 기능은 정부가 사실상 민간 은행에 이양할 의지도, 계획도 없다"면서 "규제 산업이 아닌 타 산업군 기업에 대한 충분한 재무정보와 막강한 감독권한을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를 수 있는데 이를 민간에 이양하겠는가"라며 "정책금융 주도의 구조조정은 리스크 집중의 위험이 있고 시장 경제 중심의 금융 역할, 자본시장 역할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민간으로 기능을 이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