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HK교원)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HK교원)


고등학교 시절, 화학 선생님께서 첫 시간에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이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거짓말이 될 수도 있는 것들을 여러분에게 가르칠 것이다." 충격적이었다. 진리를 배우러 학교에 왔고, 교과서는 참된 지식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학에 들어가서 '과학사', '과학철학'이나 '인식론' 등의 철학 과목을 수강하면서, 나는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의 진의를 깨닫게 됐다. 서구 과학의 역사가 그 진의를 여실히 보여줬다. 오래전에 서양인들은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구를 중심으로 해와 달과 별이 돌고 있다는 천동설은 만고의 진리였다. 그때의 학생들은 그 내용을 달달 외우고 시험문제를 풀어야 했을 것이다. '선생님, 그런데 좀 이상해요.' 의문을 제기하는 학생은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열등생 취급을 받았을 것이며, 선생님은 그를 딱한 눈으로 쳐다보았을 것이다. '이해 못하겠으면 그냥 외워라.' '무대뽀'로 밀어붙이는 선생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존의 지식을 습득하기 바쁜 '우등생'보다는 그것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열등생'이 사실은 더 똑똑한 학생임을 역사는 환히 보여준다. 서양과학의 역사는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케플러 등과 같은 '물음쟁이'들이 나타났을 때, 혁명적인 전환을 겪었다. 기존 질서에 순응하며 천동설을 신봉하던 '우등생'들이 종교와 정치적인 힘으로 '열등생'들의 의혹과 반란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그것은 아니 될 말이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을 통해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의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줬다.

'우리가 지금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은 절대적이고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당대 과학자, 당대 지식인들이 진리라고 합의한 내용에 불과하다.' 과학철학자와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이 이 말에 동의한다. 설령 플라톤이 말했던 절대적이고 영원불변하는 이데아와 같은 진리와 실체가 있고,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지식이며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고 학문이라고 해도, 인간의 인식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여전히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학문과 과학, 기술이 나날이 진보한다는 말은 인간이 불완전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정한 진보를 원한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되, 우리가 어느 부분에서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현재의 통념과 상식과 지론에 대해 제기되는 반론과 비판에 우리를 기꺼이 맡겨야 한다. 비판과 다양한 의견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우아한 태도로 토론과 논쟁에 나서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성인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용기다.

'역사'는 '과학'보다는 더 주관적이며, 논쟁의 여지가 훨씬 더 넓다. 과학자가 다룰 사실보다 역사가가 다룰 사실이 주관적인 판단에 훨씬 더 물들기 쉽다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역사가는 있었던 사실을 말하고, 시인은 있을 수 있는 일을 말한다.'고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순진한 지식인은 없다. 역사가도 사람이고, 자신만의 고유한 정치적, 사회적 위치를 가지며, 그에 따라 특정한 가치관과 시각을 갖기 마련이다. 하나의 사실을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역사가의 해석이 개입됨을 의미한다.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내가 나서야만 올바른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다양한 역사 해석이 경쟁하는 것은 단순히 국론의 분열이 아니라, 학문적인 건강함의 징표이다. 정치가의 임무는 학문적 해석을 인위적으로 단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들이 다양한 해석을 가지고 건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그때 정치가는 역사와 학문에 기여할 수 있다. 지금 한국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수많은 학자, 교사, 학생 등의 지성인들이) 정치적인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목소리로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데에는 쉽게 무시하거나 억압할 수 없는 똑똑한 이유가 있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HK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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