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벅적한 결혼식장에 황금사과가 던져졌다. "가장 아름다운 여성에게"라는 글씨가 눈부시다. 그곳에 모여 있던 여성들은 모두 사과에 매혹되었다. 세 여신이 아름다움을 뽐내며 주인을 자처하고 나섰다. 아테나, 헤라, 아프로디테. 셋 중 그 누구에게 사과를 준다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신들이었다. 제우스는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를 심판관으로 지목했다. 여신들은 사과를 얻기 위해 파리스를 유혹했다. 헤라는 막강한 권력을, 아테나는 지혜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대가 나를 선택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살 수 있게 해주겠노라' 아프로디테는 사랑을 약속했다. 여러분이 파리스라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노숙자들을 대상을 트로이아 전쟁에 관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한 분이 질문을 했다. '누가 가장 뛰어난 영웅인가?' 나는 망설임 없이 아킬레우스라고 대답했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운명을 안고 불멸의 명성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 최고의 전사였다. 멋지다. 누가 뭐래도 트로이아 전쟁 이야기의 주인공은 단연 그였다. 트로이아의 목마로 승리를 쟁취한 오뒷세우스나 트로이아를 위해 끝까지 싸운 헥토르도 그들에 못지않은 최고의 영웅이라고 했다. 나도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누가 가장 멋있어 보입니까?" 그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저는 파리스라고 생각합니다." 파리스? 그는 아프로디테에게 황금사과를 건네주고 세상의 최고 미인 헬레네를 차지했다. 문제는 그녀가 스파르타의 왕비였다는 것이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 왕은 분노하였고 트로이아를 공격했다. 전쟁은 10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것이 다 파리스 때문이었다. 헥토르는 그를 꾸짖었다. "못난 녀석, 겉모습만 잘났지, 계집에 정신 나간 사기꾼! 넌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결혼하기 전에 죽었어야 했다." 사랑의 불장난으로 조국을 파멸로 몰고 간 파리스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그런 파리스를 최고의 영웅으로 꼽다니, 뜻밖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의 대답은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는 잘나가던 사업가였다. 돈도 많이 벌었고, 권력에도 가까웠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굽실거렸고 명예는 드높았다. 그러나 부도가 나고 회사가 망하자, 모두 그를 외면했다. 부인은 남은 재산을 몰래 챙겨 자식들과 함께 외국으로 잠적했다. "돈과 권력, 명예도 누려봤지만 다 부질없었지요. 순식간에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파리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사랑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내 곁을 끝까지 지켜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살만합니다." 그의 대답이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기병대라고 하지, 어떤 이는 보병대라고, 또 어떤 이는 함대라고 한다네, 검은 빛 대지 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하지만 나는 말하리라, 그것이 무엇이든 각자가 사랑하는 것이라고." 서양 최초의 여류시인인 사포의 시다. 다른 사람들이 전쟁 영웅을 찬양할 때, 그녀는 조국도, 부모와 자식, 남편을 버리고 사랑을 얻기 위해 파리스를 따라간 헬레네를 노래했다. 누가 봐도 불륜을 저지른 파리스와 헬레네를 사랑의 이름으로 칭송하는 것은 우리의 정서와 잘 맞지 않는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만 그들을 보지 않고 그 안에 깃든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그들은 사뭇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롯이 사랑을 위해 아무런 조건도 따지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린 두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에 비한다면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 가며 상대를 저울질하고 사랑과 결혼을 망설이는 사람들은 비겁하고 추한 것이 아닌가?
사포의 시처럼, 내가 사랑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내가 사랑하면 내 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되고, 내 자식은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사랑하라,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변하리라. 사랑을 잃는 순간 세상은 추하게 일그러질 것이다. 파리스와 헬레네를 위해 성서의 한 구절을 덧붙이고 싶다. '그대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어야겠지만, 그중에 제일은 바로 사랑이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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