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로 이룬 70년 성장신화
(11) CDMA 개발주역 좌담회
"산업계 등 외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구자들을 믿고 반드시 성공해달라고 힘을 실어준 정부와, 이에 응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쏟은 연구자들 간의 신뢰 관계가 대한민국 이동통신의 성공 신화로 이어졌습니다."
지난 11일 서울 정동 한 식당에서 만난 '코드분할다원접속(CDMA)' 기술 개발의 주역 박항구 소암시스텔 회장과 한기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초빙연구원은 당시를 떠올리며 '성공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박 회장은 CDMA 개발 당시 이동통신연구단장을 맡아 연구진을 이끌었으며, 한 책임연구원은 수석부장으로 연구를 주도했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디지털 이동통신 기술인 CDMA는 이동통신의 불모지였던 한국의 위상을 국제 표준을 선도하는 국가로 높여놨고, 현재 세계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이동통신 산업의 발판이 됐다.
당시 벤처기업이었던 퀄컴의 검증되지 않은 원천기술을 가능성만 보고 도입해 우리 연구진의 손으로 상용화까지 성공시킨 CDMA 개발 스토리는 우리나라 정보통신 역사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소재다. 그만큼 CDMA 기술 개발 성공이 국내 산업에 미친 영향력이 막대했고, 개발 과정도 역동적이었다.
이날 만난 개발 주역들은 앞으로 5세대(5G) 시대를 맞이할 정보통신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제2의 CDMA 신화'를 만들고 세계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선 보다 혁신적인 R&D 전략과 정부와 연구계, 산업계의 밀접한 협력이 필수라고 입을 모았다.
<참석자>
박항구 소암시스텔 회장
한기철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초빙연구원
김정기 미래창조과학부 정보통신방송기술정책과장
안경애 디지털타임스 생활과학부장(사회)
▷김정기=업무를 하면서 두 분 이름을 익히 들었다. CDMA 상용화 성공신화에 대해 많이 듣고 정책에 반영하고 싶다. 하지만 예전과는 환경이 바뀐 부분도 많다. 지금은 민간 영역이 많이 발전했고 무게 중심도 옮겨져 정부 역할을 어떻게 찾아갈지 고민이다. 또 이동통신 시장이 글로벌 무대로 옮겨가면서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어서 상당히 복잡한 변수가 주어진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성공 신화의 주역들에게 많은 조언을 듣고 싶다.
▷박항구=처음 이동통신 기술을 개발할 당시 세계적으로 '이동통신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미국 AT&T는 1970년대에 이동통신 사업부서가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별 재미를 못 봐 이 부서를 다른 회사에 2000만달러에 팔았다. 하지만 1980년대 이동통신이 본격적으로 가능해지자 36억달러에 사업을 다시 사들였다. 그만큼 이동통신 산업이 급변하던 시기였다.
우리나라에는 1983년에 이동통신이 처음 들어왔는데, 기술적 한계 때문에 서울 시내에 가입자가 50만명이 넘으면 서비스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하려면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이 필요했는데, 기술을 사오느냐 개발하느냐가 초유의 관심사였다.
당시 TDX(전전자교환기) 개발 성공의 맛을 본 체신부 정책 담당자들이 이동통신 시스템도 국내 개발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기업들도 이전에 외국 교환기를 들여와 상표만 붙여서 팔다가 TDX를 만들어서 팔아보니 훨씬 이윤이 많이 남는 걸 경험하고는 무조건 개발에 달려들겠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전적으로 국내 기술로 개발하기는 어려워 해외 기술을 어느 정도 도입해 개발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ETRI에서 먼저 기초연구를 했는데, 해외 아무 곳에서도 기술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매우 고전하다가 퀄컴의 CDMA 기술을 발견했지만, 당시 아무도 인정 안 할 정도로 위험하고 어려운 기술이었다. 체신부 내부에서도 반신반의했고, ETRI에서도 자신 없는 부분이 있었던 만큼 CDMA를 표준으로 결정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CDMA에 대한 면밀한 검토 결과 잠재 가능성을 확인했고, 퀄컴과 공동 개발 협상에 들어갔다. 공동 개발은 4단계로 진행하고, 어느 정도 개발하면 생산 업체를 참여시키되 850만달러씩 착수금을 퀄컴에 지불하기로 했다. 1991년에 기초적인 1단계 연구를 시작했고, 1992년부터 본격적인 2단계 공동 연구에 들어가 시스템 개발업체로 삼성전자와 LG정보통신, 현대전자를, 단말기 개발 업체로 이 3개 회사와 맥슨전자를 선정했다.
▷사회=CDMA 개발과정이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한기철=잘 알려진 것처럼 집에 못 가고 야근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 힘들었던 건 개발 과정에 잡음이 많고 4년 동안 단장만 3번 바뀌고 부장 2명이 좌천될 정도로 부담이 컸다는 점이었다. TDX는 모두가 합심해 밤새워 만들기만 하면 됐는데, CDMA는 퀄컴이란 미국 기업과 공동개발을 하다 보니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퀄컴과 ETRI 연구자들은 실질적인 구조나 디자인에서 서로 생각이 달랐다. 퀄컴은 칩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말기나 시스템 장비도 직접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이런 속마음을 갖고 공동연구를 하니 우리 것이 아니라 자신들 장비를 만들려고 회로를 안 보여줬다. 우리 연구자들이 가면 그들이 기술을 자세히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구석에 있는 방에 들어가 나오지도 못하게 했다.
▷박항구=퀄컴과의 공동 개발은 네트워크는 우리 기술을, 무선접속 기술은 퀄컴 기술을 활용해 시스템을 개발하고 성공하면 나눠 갖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퀄컴이 시스템 장비 사업까지 욕심내면서 우리가 쓰려고 했던 TDX 교환기를 쓰지 않고 다른 교환기를 쓰는 설계를 고집했다. 결국 양쪽이 독자 노선을 걷기로 했는데, 나중에 퀄컴이 우리 네트워크 장비와 단말기를 보더니 관련 사업을 매각하고 본연의 자세로 칩 개발만 하겠다고 했다. 시스템 시험에 쓴 퀄컴 단말기는 무게가 800g에 달했는데, 1년 정도 후 우리가 개발한 단말기는 150g밖에 안됐다.
▷한기철=CDMA라는 믿을 수 없는 기술과 퀄컴에 대한 불신까지 겹친 상황에 개발 진도가 안 나가니 윤동윤 당시 체신부 장관은 신용섭 전파관리국 기술과장을 내려보내 1주일에 한 번씩 진행상황을 직접 보고하게 했고, 속이 타던 양승택 당시 ETRI 소장이 결국 1994년에 내부 조직을 전부 교체했다. 지금 보기에는 개발에 성공했으니 열심히 해서 잘됐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시 연구자들은 생사를 걸고 열심히 하는 것 이상으로 일했다.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한 사람은 바로 해임될 정도로 터프한 환경이었다.
▷박항구=1994년 1월 조직개편으로 이동통신연구단장을 맡으면서 3가지를 먼저 정리했다. 먼저 불화로 인해 끊어진 퀄컴과의 교류를 다시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퀄컴이 한국에 오고, 다음 달은 우리가 미국에 가서 점검하는 방식으로 공동 개발을 진행하기로 했다. 연구단 내부에서는 시스템 구조 재설계에 들어갔다. CDMA 개발이 급히 진행되다 보니 전체 시스템 능력이나 통화량 등 여러 지표에 맞는 설계가 됐는지 검증을 못해 구조 설계가 취약했다. 이런 취약점을 TDX 개발 경험이 있는 연구진들이 찾아내 개선하기 시작했다. 성공 가능성에 대해 불만을 갖기 시작한 생산업체들도 불러 업무를 다시 분담하고 빨리 제품을 만들어오라고 지시했다. 두 달 만에 'CMS-1'이라는 시스템을 만들고 4월부터 시험에 들어갔는데, 한 번의 콜을 연결하기 위해선 시스템 내 구성요소와 장치들 간에 140번 통신을 해야 했다. 연구원들이 그 과정을 단계별로 확인하고 고쳐가는데 정확히 20일 동안 밤을 새웠다. 휴대폰과 휴대폰 간 통화가 되는 것을 '에어콜'이라고 부르는데, 그 해 4월 20일에 처음 에어콜에 성공했다.
▷사회=CDMA 개발 성공은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믿고 정책적으로 지원해준 정부 역할도 컸던 것 같다.
▷한기철=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CDMA를 표준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날로그 방식을 좀 더 해보자는 얘기와, 미국 TDMA나 유럽 GSM을 그대로 들여오자는 주장이 있었다. 만약 GSM이 들어왔으면 지금의 삼성은 없었을 것이다. 시스템은 에릭슨이 준비를 다 해놨고, 단말기는 노키아 폰이 세계 최고였다. PCS 주파수로 1.8㎓ 대역을 추가로 선정하는 등 정책적으로 CDMA를 강력하게 밀어준 것이 정보통신부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박항구=CDMA 개발 당시 이동통신은 대륙별로 그룹화돼 있었다. 미국과 유럽, 일본이 2세대까지 각기 다른 시스템을 갖고 있었고, CDMA는 국제 표준으로 보면 조금 떨어져 있는 이단아였다. 특히 GSM이 워낙 주도면밀하게 규격을 만들어 단말기부터 시스템 구성요소들을 완벽하게 표준화했다. 누구나 기술만 있으면 만들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 기술을 알 방법이 없었다. 우리가 선택한 CDMA는 나중에 미국 표준에 합류해 GSM의 대항마가 됐으며, 잡음에 유리하고 가입자 용량이 10배에 달하는 장점을 바탕으로 한국과 미국, 호주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CDMA 벨트'를 형성했다. 한때는 GSM을 CDMA가 7대 3 정도까지 따라갔다. 나중에 미국이 3세대 이동통신에서 CDMA를 버리고 GSM의 연장인 WCDMA로 돌아서면서 결국 진 셈이 됐지만, GSM을 따라가지 않고 CDMA 개발이라는 독자 노선을 걸어 실력을 키웠기 때문에 3세대 이동통신 시장도 재빠르게 선점해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다.
▷사회=CDMA는 우리나라 산업 지도를 바꿀 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경제적 효과와 더불어 CDMA가 남긴 유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한기철=CDMA 상용화 성공 이후 가장 괴로웠던 것은 원천기술은 퀄컴 것이고 단말기는 제조업체들이 잘 만든 것인데 ETRI가 한 게 뭐냐는 지적이었다. 오히려 제조업체들이 퀄컴에 로열티를 내도록 부담만 준 게 아니냐는 말도 많았다. 당시에는 원천기술이 전혀 없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대단히 섭섭했다. 한이 맺혀 원천기술을 확보해 로열티를 받는 국가로 체면을 세우겠다고 개발한 것이 'IMT-2000'이다. 원천기술 몇 가지를 더한 IMT-2000은 처음으로 개발 비용을 로열티로 모두 환수한 기술이다. 3세대 이동통신에서 원천기술로 로열티를 받는 국가가 된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통신방식을 적용해 만든 시스템이 '와이브로'다. 시장이 3G만큼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이 만든 기술이 국제표준으로 채택이 됐고, ETRI가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단계를 지나 새로운 패러다임과 서비스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박항구=정통부 자료에 따르면 1996년 CDMA 서비스 개시부터 2002년까지 7년간 185조원의 생산유발 효과, 222만명의 고용 유발효과를 얻었다. 이동통신 기술을 개발하면서 정통부가 전 대학에 IT연구센터(ITRC)를 설치한 것도 CDMA가 남긴 중요한 유산이다. 우리나라가 이동통신 강국이 되는 데 여기서 양성한 인력이 큰 힘이 됐다.
▷한기철=TDX 개발이 국내 부품산업 기반 마련으로 이어졌다면 CDMA는 벤처 붐과 연결되면서 국내 엔지니어들이 '우리도 개발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줬다. 과거에 PCB 기판을 열어보면 모두 노란색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에폭시 수지를 쓴 초록색이다. TDX 개발 전에 쓰던 노란 기판은 단면이었지만, TDX를 만들며 다층 기판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TDX를 개발하지 않았더라면 기술이 있어도 수요가 없어서 이런 국산 제품을 못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TDX는 워낙 대형 장비라 작은 업체들이 함부로 넘보기 어려운 제품이었다. 반면 CDMA는 단말기 업체도 여러 곳 있었고, 업체들이 스스로 중계기를 개발해 수조원 시장을 창출하기도 했다. CDMA를 직접 개발하지 않아 수입 장비가 들어왔다면 지금 국내 디지털 하드웨어 산업 기반이 없었을 것이다.
▷사회=앞으로 우리나라는 5G 등 미래 시장 선점을 위한 원천기술 확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CDMA 개발 경험을 통해 조언을 한다면.
▷김정기=CDMA라는 단일 표준을 선정해 퀄컴이라는 벤처기업과 손을 잡고 개발한 것은 매우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시도였다고 얘기한다. 지금도 R&D를 논하면 모험적·도전적 연구를 많이 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는 만큼,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도전적이라고 막무가내로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퀄컴이란 회사를 발견하고 CDMA를 채택한 것도 이동통신에 대한 사전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도전과 모험도 중요하지만 이를 가능하게 만들려면 연구자들이 안정적으로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 또 하나의 메시지는 상용화 단계에서 출연연이 기업과 협력해야 한다는 부분이다. 원천기술 역량을 확보하고 중소기업을 지원해 새로운 산업을 만드는 것이 출연연의 역할이고, 앞으로 5G에서도 그런 개념을 갖고 접근해야 할 것이다.
▷한기철=정부 예산 구조상 예전처럼 하나의 과제에 수백억원씩 지원하면서 몇 년을 기다려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산업계의 먹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것도 결국 그럴만한 아이템이 있느냐의 문제다. 정부와 ETRI의 역할도 변할 수밖에 없다. TDX나 CDMA는 성공만 하면 시장은 확보돼 있었다. 하지만 와이브로부터는 점점 고민이 많아졌는데, 기술 개발에 성공해도 수요 차원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5G도 무조건 대형 사업으로 추진해 돈만 많이 주면 큰일을 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새로운 시장을 어떻게 만들지 IT 산업 자체에 대해 고민하고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이미 애플과 구글,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는 IT 산업을 서비스 개발 산업으로 가져가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이런 흐름에서 빠져있다. 과거에는 앞에 있는 1등, 2등의 등만 보고 쫓아가면 됐지만, 이제 가장 앞에 서서 길인지 아닌지 모르는 곳을 뛰어야 한다. 이제는 통신 속도만 높이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관점을 더해 새로운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할 때다.
▷사회=각자의 인생에 있어 CDMA는 어떤 의미였나.
▷박항구=평생 직장생활을 CDMA와 같이했다. CDMA 이후에는 출연연에서 그만큼 큰 프로젝트가 없었다. CDMA 개발에 참여한 것은 축복이었다. 생활 전체가 온통 CDMA 개발밖에 없었다. 집에서는 재미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애들이 어떻게 컸는지도 몰랐다. 집이 ETRI에서 걸어서 5분 위치에 있었다. 저녁 먹고 또 나가서 일하고 온 생활이 연구에만 몰두했다.
▷한기철=과학기술자로서 CDMA는 인생의 전부였다. CDMA를 해서 꽃을 피웠고, 그 후 와이브로 개발을 총괄했다. 그 이후 모든 여정의 바탕에는 CDMA가 있었다. CDMA 개발을 안 했으면 국내 산업지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20년 전 얘기를 지금 이렇게 하는 자체가 CDMA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고, 그만큼 우리나라 ICT의 중요한 초석이라는 것이다.
정리=남도영기자 namd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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