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후보 거론 이태규·산림녹화 선구자 현신규 식량산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우장춘 박사 등 한국전쟁 직후 황폐한 땅에서 과학기술 기초 다져
■ 기술로 이룬 70년 성장신화 (2) 황무지 위에 '기술성장' 씨앗 뿌린 1950~1960년대
대한민국이 전쟁의 포화를 겪으면서도 황무지 위에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초고속 성장이란 마천루를 세운 광복 70년의 역사는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 기적을 가능케 한 것은 잘 살아보겠다는, 그래서 자식들에게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전 국민의 뜨거운 의지였다.
밀가루 한 포대와 쌀 한 가마가 아쉬웠던 시절, 국민들의 목숨을 걸고 결정한 베트남전 파병 대가로 받은 돈은 과학기술 연구기관 설립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산업 육성에 쓰였다. 앞서 살아간 이들의 땀과 희생이 잘 사는 대한민국의 밑거름이 됐다.
자본도 산업화 경험도 없던 대한민국은 기술 개발에 목숨을 걸고 선진국을 베끼고 따라잡으면서 반도체, 조선, 자동차, IT, 철강 등 세계적으로 강한 산업을 일궈냈다. 이제 대한민국호 앞에 놓인 절대적인 과제는 선두에서 앞서가는 방법을 체득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을 통해 이뤄낸 광복 70년 성장의 스토리를 시리즈로 조명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없다. 전문가들은 국내 과학기술 역사를 고려할 때 10년 뒤에는 수상자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전망을 내놓는다.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과학기술 연구개발(R&D)은 보통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부터 시작됐다고 보는데, 두 세대에 해당하는 60년 정도가 지나야 노벨상을 받을 만한 결실을 맺지 않겠냐는 분석이다. 이미 19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은 자국의 서구식 과학기술 연구 출발 시기를 19세기 말 메이지유신 시기로 본다. 이후 60여 년이 흐른 1949년 유카와 히데키가 첫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의 과학자들이 노벨상과 거리가 멀었던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 '제1호 화학박사'인 이태규 박사는 이미 60년 전에 미 유타대학에서 양자화학의 세계적의 권위자인 아이링 교수와 함께 연구한 '리-아이링 이론'으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됐고, 196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추천위원이 됐다.
이태규 박사가 뉴턴역학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던 분자 세계를 방정식으로 풀이한 리-아이링 이론 연구에 몰두한 1950년대 초반 한국에는 6·25 전쟁이 발발해 이 박사는 가족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박사는 가족 걱정과 그리움을 잊기 위해 밤낮으로 연구에 몰두했고, 화학 역사에 남을 획기적인 기술 발전을 이끌었다.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간 학생들을 직·간접적으로 지도해 훌륭한 학자들을 배출했고, 1973년 한국과학원의 석좌교수로 귀국해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연구를 계속하며 국내 화학계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이 박사는 1992년 별세 후 국립묘지에 안장된 1호 과학자가 됐다.
이렇듯 다른 선진국보다 과학기술의 역사는 짧을 지 모르지만, 국내 과학기술인들은 열정에서만큼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았다. 1945년 광복의 기쁨을 맞이한 것도 잠시, 한국전쟁으로 온 나라가 황폐화된 1950년대 대한민국은 과학기술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과학기술인들은 학문 자체에 대한 열정과 더불어 국가를 다시 살리고 국민들을 배고픔에서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오직 연구에만 헌신해 국가 발전의 기틀을 세웠다.
◇현신규 박사, 헐벗은 국토를 녹색으로 덮다="평생을 나무하고만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나무는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됐고 내가 나무 속에 있는지 나무가 내 속에 있는지조차 모를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또 그러다 보니 사람의 마음속은 헤아릴 줄 몰라도 나무의 생리나 애환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눈이 트였고, 나무와의 대화 속에서 나무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게 됐다."
'한국 임목육종학의 창시자'이자 '산림녹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고 현신규 박사가 남긴 말이다. 일제의 수탈과 6·25전쟁을 거치며 헐벗은 우리 국토를 다시 푸른 숲으로 덮은 일등공신이 바로 현 박사다. 그가 개발한 '리기테다소나무'는 1960년대 미국의회에 '기적의 소나무'로 소개됐으며, 아직도 미국 임목육종학 교과서에 사진이 실려 있다. 리기테다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며 추위와 병충해에도 강한 '리기다소나무'와, 생장이 빠르고 재질이 좋은 '테다소나무'의 장점만 모은 나무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성공한 '교잡종'으로 평가된다.
현 박사가 15년에 걸친 연구 끝에 '은백양나무'와 '수원사시나무'를 교잡해 개발한 '은수원사시나무'도 걸작으로 꼽힌다. 포플러 종류의 나무는 물을 많이 필요로 하고 경사진 곳에 살기 어렵다는 통념을 깬 나무로, 빨리 자라고 대규모 번식이 쉬워 우리나라 전 국토에 심어졌다. 현 박사의 연구에 힘입어 전 국토의 65%에 달하는 산림은 황톳빛 민둥산에서 단기간에 푸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은 국토 녹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현 박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은수원사시나무에 그의 성을 따서 '현사시나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우장춘 박사, 속이 꽉 찬 배추로 국민의 배를 채우다=광복 이후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던 각종 채소 종자의 반입이 중단돼 국가적인 곤경에 처하자 국내에서는 이미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손꼽히던 우장춘 박사를 모시기 위한 '우장춘 박사 환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됐다. 평소 인생의 절반은 어머니 나라인 일본에서, 나머지 절반은 아버진 나라인 한국에서 살고자 했던 우 박사는 마침내 1950년 한국 땅을 밟았다. 일본인 아내와 2남 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한반도 정세가 불안했기 때문에 모두 일본에 두고 왔다. 그는 곧바로 부산 동래에 있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을 맡았다.
우 박사는 1936년 '배추 속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 논문을 통해, 식물은 같은 종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고 알려졌던 학계에 종이 달라도 같은 속 식물을 교배해 전혀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식량 산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현대 유전학 교과서에도 중요한 내용으로 소개하고 있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우 박사는 생산량이 적고 크기와 모양이 불균일한 재래종 배추와 중국 배추의 장점을 접목해 속이 꽉 차고 포기가 크며 병에 강한 '원예 1호'를 개발했다. 이 배추는 국내 채소의 자급 기반을 마련했으며, 훗날 '속이 꽉 찬 현대 김치배추'의 효시가 됐다. 또 우 박사는 바이러스에 취약했던 강원도 감자를 개량하고 제주도에 감귤을 심도록 재배 기술을 연구하는 등 국내 농업 발전의 터전을 닦은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우 박사는 한국어를 하지 못했고 가족도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의심한 한국 정부는 그의 출국을 금지하는 조치까지 했다. 우 박사는 정부의 농림부장관직 제의도 거절하고 숨을 거두기 전까지 오직 국민들에게 더 좋은 종자를 보급하기 위한 연구에만 매달렸으며, 1959년 숨을 거두기 직전 병석에서 문화포장을 받고 비로소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며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