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식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MRC 내인성리간드 신호전달조절 항암제 연구센터)
김영식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MRC 내인성리간드 신호전달조절 항암제 연구센터)


최근에 영국문화원은 지난 80년간 세계를 바꾼 80대 사건 중에서 첫 번째가 1989년 세계 인터넷망 개발이고 둘째가 페니실린의 대량생산 방식 개발을 뽑았다. 대부분이 페니실린의 개발을 하면 플레밍을 떠오르지만 대량 생산의 기틀을 만든 과학자가 누구냐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플레밍은 곰팡이의 분비물이 수많은 세균들에 대해 활성을 나타내는 것을 발견했지만 당시 성분이 밝혀지지 않았던 페니실린이 불안정하고, 항균 활성 또한 일시적이란 사실을 발견하고 1935년 페니실린에 대한 연구를 중단했으나, 페니실린 정제에 성공하고 이듬해 대량생산의 길까지 열어 페니실린이 '기적의 약'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11년 뒤인 1940년 옥스퍼드대 병리학자 플로리와 체인이 등장하면서였다.

1938년 British Journal of Experimental Pathology에 실린 그의 1929년 논문은 플로리와 함께 일했던 독일에서 건너온 유대인 생화학자 에른스트 체인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여러 유형의 동물에게 있어 흡수성과 독성에 대한 대규모의 테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플로리 연구팀은 일련의 실험을 수행했다. 그들은 쥐에게 일반적인 치사 복용량의 악성 연쇄상 구균을 주입했다. 그 중 어떤 쥐들은 페니실린을 받지 않고, 다른 어떤 쥐들은 1회 분량의 페니실린을 받았다. 그리고 나머지 쥐들에게는 규칙적인 간격으로 페니실린을 주입시켰다. 그 모든 테스트에서, 치료받지 않은 쥐들은 18시간 이내에 죽었다. 대조적으로 치료받은 쥐들은 살아남았다. 테스트 결과들은 플로리가 임상실험을 위한 충분한 양의 페니실린을 생산하는 데 도움을 줄 산업체의 협력자를 찾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2차 대전 중이라 영국 정부나 어떤 영국 회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에 플로리와 그의 동료 히틀리는 미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국 정부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군인들이 상처 자체보다는 상처로 인해 유발된 감염으로 인해 사망자수가 훨씬 많은 사실에 사상자 수를 줄일 수 있는 그 무언가를 갈망했고 그러한 점에서 페니실린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페니실린의 생산을 최우선으로 여기게 됐다.

초기에, 페니실린은 병원의 환자 용변기를 재조립한 크고 평평한 배양접시에서 발효되었다. 미국 일리노이주의 페오리아에 있는 미 농무성 국립연구소의 과학자인 모이어와 영국의 히틀리는 페니실린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협력했다. 그들은 포도당 대신 옥수수 녹말의 추출에서의 부산물 액체와 유당을 발효에 첨가하는 것과 같은 변화를 주어 실험을 했다. 그들은 또한, 표면 대신 배지 속에 잠기도록 한 배양 방업을 이용하여 페니실린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였다. 또한 항생 역가가 높은 Penicillium 속의 균주를 지역 주민의 도움으로 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43년 영국과 미국의 정제 연구에서 단지 하나의 페니실린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혀졌다. 원소분석을 통하여 모핵은 같지만 미세하게 곁가지가 다른 구조를 가진 화합물로도 미생물에 대한 항생효과가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살다보면 우연인지 필연인지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뜻하지 않게 도움을 받을 때가 있고 또한 도움을 청할 때가 있다. 플로리가 런던에서 페니실린을 규명하고 생산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당시 상황은 독일군의 폭격으로 런던에서 지내기가 어려웠던 실정이었다. 플로리의 어린 두 아들들도 옥스퍼드 시절에 같이 공부를 함께 하였던 미국 친구인 예일대학교 의과대학의 훌톤 교수의 집으로 보냈다. 1942년 훌톤 교수가 몸담고 있었던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앤 밀러가 4주 동안 계속 고열에 시달렸고 많이 쓰던 설파제도 듣지 않은 상태였다. 밀러의 주치의인 번스테드 교수는 훌톤에게 플로리에게 소문으로 듣던 페니실린을 얻을 수 있도록 부탁을 했다. 훌톤은 플로리와 통화를 하면서 극비리에 생산 연구를 하고 있던 머크 제약회사의 관계자들에게서 얻을 수 있어서 이것을 밀러 부인에게 투여를 하게 되었다. 얻은 양은 5.5g이었지만 얼마를 투여할지 모르는 상태이었다. 영국에서 페니실린을 투여 받은 환자 중 6명중 4명이 회복하였고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하는 임상시험이었다. 정맥주사를 통해서 천천히 주입하여 그 다음날 체온이 떨어져 정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식욕도 회복을 하였고 몸에 있던 균도 떨어졌다. 얼마나 드라마틱한 일인가? 이러한 결과를 옆에서 직접 수행하거나 지켜본 사람들은 아마도 미래에 대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투여 후 환자로부터 오줌을 받아서 그것을 다시 머크에 보내어 70%까지 회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귀한 의약품인지 짐작이 갈 만하다.



이러한 결과는 페니실린을 대량 생산할 것인지를 확인시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후에 정부의 관심은 20곳 이상의 회사가 충분한 양의 페니실린을 생산하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도록 자극했다.

생산은 엄청나서 1944년 6월, 노르망디 작전 때 회사들은 매 달 천 억 단위의 페니실린을 생산했다. 그 당시 처음으로 페니실린을 투여 받은 밀러 부인은 90살까지 살았다. 플레밍을 포함하여 영국의 세 과학자들은 페니실린을 처음 발견하고 산업화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궁극적으로 재미를 본 것은 미국이었다. 특히, 페니실린을 많이 생산하는 균주를 미국이 보유함에 따라서 기술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현실에 영국은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했던 것 같다. 이를 거울삼아 후에 영국의 글락소는 페니실린이 듣지 않는 그램 음성의 균주에도 효과를 보이는 세팔로스포린 항생제를 처음으로 생산하게 되어 과학적인 명예를 되찾았다. 플레밍, 플로리 그리고 체인은 페니실린의 발견과 제조로 1945년의 노벨생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플로리는 호주 출신이어서 호주 화폐에 얼굴이 등장했다.

페니실린은 자연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축복이라고 볼 수 있다.

페니실린 발견 후에 미생물의 길항 작용을 이용해서 많은 종류의 균주로부터 다양한 항생제들이 찾아졌다. 그 중의 하나가 미국의 왁스만과 대학원생이었던 샤츠는 방선균인 Streptomyces griseus 로부터 또 하나의 치명적 감염 질환인 결핵균에 대한 항생제인 스트렙토마이신을 찾았다. 일부 미생물이 사람에게 해를 주지만 많은 미생물은 사람과 공생을 하고 절대적인 도움을 준다. 흥미롭게도 모든 미생물이 서로 길항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닌 점이다. 왁스만과 샤츠는 독일의 박해를 피해유대인으로 동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그들의 꿈을 실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특허 문제로 무척이나 알력이 심해져 서로 남남이 되었다.

플레밍은 70년 전 노벨상 강연에서 무엇이 정말 주요한 문제가 될 것인지 이미 예견했다. 그것은 항생 물질에 대한 내성이었다. 플레밍은 "누구든지 가게에서 페니실린을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무지한 사람들이 쉽게 약을 복용하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그의 몸 안에 있는 세균이 치명적이지 않은 양의 약물에 노출됨으로써 그 세균이 내성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영식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MRC 내인성리간드 신호전달조절 항암제 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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