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규 IT정보화부장
임윤규 IT정보화부장

비밀은 필요한 이들만 공유할 때 비밀로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은밀하고, 치밀하고, 철저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판도라 상자가 열리듯 비밀이 외부에 공개되는 날, 비밀은 부메랑이 되어 비밀주체의 목을 친다.

주민등록번호에 대한 얘기다. 내 주민번호가 갖는 비밀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주민번호는 우리 국민이 태어날 때 부여받는 고유번호로, 평생 변하지 않는다. 본래 이 번호는 정부가 편리한 국가 행정 업무를 위해 생년월일, 출생지, 성별 등의 정보를 담아 국민에게 부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민간영역까지 이용이 확대돼 고객 분류나 관리 용도로 쓰였다. 이 때문에 13자리 주민번호만 있으면 개인이 쌓아 온 인생 전체, 자산 전체에 대한 정보 접근이 가능하게 됐다. 금융, 부동산, 의료, 인터넷, 스마트폰 속 사적 대화 내용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에 대한 내용까지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다.

개인에게 이토록 은밀한 정보인 주민번호가 이미 대량 유출됐다. 정보 정확도가 매우 높은 신용카드 정보가 1억건 넘게 유출됐고, 통신사 가입자정보도 수천만건이 털렸으니 사실상 전 국민이 유출 피해자다. 주민번호가 적힌 은행 서류가 붕어빵 포장지로 쓰이는 현실에서, 우리 국민의 주민번호는 이미 술집의 술잔, 프랜차이즈 커피 점의 머그잔이 됐다.

정보로서 은밀함, 비밀성은 모두 상실했다. 해외 포털에서 우리 국민의 주민번호는 쉽게 검색할 수 있는 '공개정보'다. '단군이래 최대 수출품'이 주민번호라는 자조섞인 농담이 나올 정도다.

이 주민번호를 어찌할 것인가.

주민번호의 평생 변하지 않는 정보 특성상 유출되면 그 피해는 지속적이다. 피해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은 이 번호를 변경하는 방법밖엔 없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작년 5월 주민등록제도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권고를 내렸고, 국회는 번호 변경을 위한 방안을 내라고 행정부를 압박했다. 정부도 지난해 9월 공청회를 개최하며 주민번호 변경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해가 되면서 주민번호 변경 검토가 백지화 됐다는 사실이 디지털타임스 취재 결과 드러났다.

행정자치부의 올해 업무계획에 주민번호 개정 과제가 빠졌다. 1억건 넘는 신용카드 정보 유출로 나라가 들썩거릴 땐, 대통령까지 나서 정보유출의 심각성과 정보보호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국회는 금방이라도 법을 개정할 것처럼 호들갑이었고, 금융권을 비롯한 관련기업들은 국민앞에 고개숙이며 강력한 보안투자를 다짐했다. 늘 그랬다. 시간지나 여론 잠잠해질 만하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수십년 동안 사용해 오던 주민번호를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게 어디 쉬운일이겠나. 국민들의 여론을 모으는 일도 그렇고, 예산은 또 얼마나 들겠나. 기업도 아우성이다. 그동안 13자리 숫자 입력만으로 개인 신상에 접근해 얼마나 편하게 관리하고 마케팅 해왔는데, 이런 체계가 바뀌는 것 좋아 하겠는가.

그렇다고 이대로 둘 것인가. 하루에도 몇번씩 보이스피싱, 파밍, 메신저 피싱의 위협을 받고, 각종 해킹사고는 끝이 없다. 이 모든 범죄의 출발점이 한번 찍히면 바뀌지 않는, 번호 자체가 개인이 되어버린 주민번호다. 해커에게 주민번호는 만능키다.

우리 국민의 은밀한 비밀, 주민번호는 이미 비밀성을 상실했다. 공개된 비밀은 부메랑이 되어, 이미 직접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 새로운 잠금장치가 필요하다.

주민번호 제도 개선은 결코 늦출일이 아니다.
임윤규 IT정보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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