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발 글로벌 환율전쟁 확산 ECB, 지난달 1조 1400억유로 양적완화 발표 미 연준 기준금리 오는6월 인상 가능성 대두 1060조 가계부채 한은 기준금리 조정 '발목' 기업경기실사지수 추락… 수출 기업은 '비명'
유럽중앙은행(ECB)이 지난달 22일(현지시각) 총 1조1400억유로 규모의 양적완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전 세계는 자국 통화 가치를 전략적으로 조절하는 이른바 '환율전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달 24일 막을 내린 다보스포럼에서 캐리 콘 골드만삭스 대표는 "환율전쟁은 이미 시작됐다"며 "통화가치를 낮추는 것이 경기를 부양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우선 선진국들과 신흥국 일부가 선제적으로 움직이며 급변하는 세계 금융 시장 상황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선진국과 유럽 도미노 금리인하…돈 푸는 통화정책 확산= 글로벌 환율전쟁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은 선진국이다. ECB가 본격적으로 돈을 풀면서 유로화 가치 하락 속도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ECB의 양적완화 발표 직후 달러화 대비 유로화 가치는 11년 4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이에 따라 ECB가 양적완화를 발표하기 전인 지난달 15일 스위스 중앙은행은 2011년 9월 이후 유로화 대비 1대 1.2 비율로 유지해온 스위스프랑의 환율 하한선을 없앴다. 유로화 가치 하락 시 급증하는 환율 유지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덴마크 중앙은행은 최근 2주간 금리를 3번이나 인하해 연-0.5%까지 떨어뜨렸다. 지난달 20일에는 캐나다도 기준금리를 연 0.75%로 0.25%p 인하했다. 최근 싱가포르 중앙은행인 싱가포르통화청도 당분간 통화정책을 완화 기조로 가기로 했다. 지난해 이미 추가 양적완화를 결정한 일본도 올해에 한 차례 더 양적완화를 단행할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또 호주도 기준금리 인하에 동참할 것으로 보인다. 호주는 지난해 4분기 소비자물가지수가 전년대비 1.7% 상승하는 데 그치며 2년 6개월 만에 2% 밑으로 떨어졌다. 지난달 29일 오전 호주 채권시장에서는 10년 만기 국채금리가 역대 최저치인 2.478%까지 하락했다. 향후 기준금리 인하 기대가 커지면서 현행 기준금리인 2.50%보다 밑돌게 된 것이다.
유럽 국가들의 기준금리 인하 행진은 다음 달에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BNP파리바는 다음 달 중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기준금리를 각각 0.25%p 인하할 것으로 예상했고, 폴란드는 0.5%p의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으로 내다봤다.
◇신흥국으로 확산과 미국 금리인상 변수= 선진국에서 시작된 통화정책 변경의 폭풍은 신흥국에도 불어 닥치고 있다. ECB의 양적완화 발표 직후 인도는 긴급 통화정책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연7.5%로 0.25%p 인하했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기습' 인하였다. 터키 역시 기준금리를 연7.75%에서 0.5%p 낮췄고, 페루는 기준금리를 0.25%p 낮춰 연3.5%로 가져가기로 했다. 페루의 이번 기준금리 인하는 최근 7개월 동안 3번째다.
반면, 브라질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율 상승을 억제하기 기준금리를 12.25%로 인상했다. 바클레이스 캐피탈은 다음 달 줄 브라질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추가로 올릴 것으로 전망했고, BNP파리바는 브라질 중앙은행이 올해 중 기준금리를 13%까지 인상할 것으로 예상했다.
글로벌 환율전쟁의 변수는 미국이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신흥국들은 적정한 통화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저금리 전략 대신 외국인 투자자금 유출을 막기 위해 금리를 인상할 수밖에 없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는 통화량을 긴축하기 위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기준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다. 경제지표를 보면 명분도 충분하다. 지난달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3%로 전망되고, 실업률은 5.6%로 연준의 목표치인 6%보다 낮다. 실물 경기가 회복세에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직후 연준은 "통화정책을 정상화(기준금리 인상)하는 데 인내심을 발휘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말까지 시장에서는 연준이 9월께 기준금리를 올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이번 연준의 발표로 기준금리 인상 시기가 6월로 앞당겨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상재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연준이 오는 6월 기준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딜레마에 빠진 한국 통화정책=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이 예상됨에 따라 한국 통화 당국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김성훈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미국과 유럽의 통화정책이 따로 가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유럽의 양적완화에 대응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내릴 수도 없고, 미국 상황에 맞춰서 기준금리 인상을 예고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1060조원에 이르는 가계부채도 기준금리 조정에 발목을 잡는 요인이다. 지난달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외신기자클럽 초청간담회에서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해 10월 이후 가계부채가 증가하면서 금융 안정과 관련한 위험에 유의할 필요가 커졌다"며 "올해의 위험 중 하나는 각 (나라마다) 상반된 통화정책"이라고 말했다.
한은이 머뭇거리는 사이 한국경제를 지탱하는 수출기업들의 어려움은 더 커질 전망이다. 한은은 지난달 30일 발간한 '1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 보고서를 통해 지난해 12월 76이던 수출기업의 BSI는 지난달 1월 75로 떨어졌다고 밝혔다. 이달에는 74로 1p 더 하락할 전망이다. BSI는 기업이 느끼는 경기 상황을 지수화한 것으로, 기준치인 100 이상이면 경기를 좋게 보는 기업이 더 많다는 의미고, 미만이면 나쁘게 보는 기업이 더 많다는 뜻이다.
박동화 한은 기업통계팀 차장은 "새해 들어 선진국의 상반된 통화정책 등으로 세계경기 불확실성이 확대됐고 중국의 성장세가 둔화하는 움직임을 보여 수출업체 중심으로 업황 전망이 나빠졌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