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구성진 가락과 심금을 울리는 선율을 듣거나, 감동적인 영화나 슬픈 연극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곤 한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나면, 잠깐이나마 마음이 맑고 개운해 지는 느낌을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현상을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시대적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그림 앞에서 정화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찾기는 그다지 쉽지 않다. 미술이 음악이나 연극, 영화보다 덜 감동적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미술은 다른 방식의 소통 구조를 가진 것일까?

작년 말에 영화를 한 편 보았다. 남편이 잘못 선 보증 때문에 생활고에 빠진 한 가정의 주부가 마약 운반에 동원되어 겪은 수형 생활과 석방 과정을 그린 영화였다. 영화의 중간 중간 적지 않은 관객들이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보았다. 그 눈물은 대체로 어린 딸과 그리운 남편을 두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에서 고생하는 여인에 대한 동정과 함께 애틋한 가족애에 대한 감동, 여배우의 열연, 권위적이고 무능력한 국가 기관에 대한 답답함 등이 뒤섞여서 관객들마다의 특정 감정선을 건드린 결과일 것이다. 만약 눈물의 빛깔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관객들의 눈물은 저마다의 경험에 따라 그 빛깔이 미묘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프랑스 유학 시절의 경험들을 떠올리며 보던 나의 눈물은 아마도 또 다른 빛깔을 띠었을 것이다. 특히 영화 속에서 주인공을 구하는 계기가 인터넷 강국의 댓글에서 출발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 사회를 휘몰아치다가 꼬리를 감추고 있는 국가기관의 댓글 사건을 떠올린 관객이라면 울분과 분노라는 빛깔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손쉽게 대중들과 소통한다. 음악 역시 미술에 비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간다. 영화나 음악의 경우, 작품과 관객 개인의 영혼 사이에 거리가 멀지 않다. 음악과 영화는 여러 면에서 우리의 현실을 투영하고 있다. 그 결과, 관객은 작품을 접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슬픔을 정화한다. 그러한 정화의 계기가 많을수록, 특별할 것 없고 진부한 경험이 세련되고 고상한 경험으로 바뀌는 심리적 과정인 승화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미술은 정녕 이러한 체험을 제공하지 못하는가? 단언컨대 미술도 정화나 승화의 계기를 제공한다. 다만 미술 작품과 우리 사이에는 그 폭이 결코 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의 일부는 우리의 현실을 투영하는 방식이나 얼마만큼 충실히 투영하는가 라는 측면에서 작품 자체가 지닌 한계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일부는 영화나 음악처럼 익숙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관객에게도 책임이 있다.

미학과 미술사라는 학문에 발을 들이고 미술관이라는 곳을 자주 드나들게 되면서, 감동을 넘어 울컥하게 되는 작품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몇 년 전에는 급기야 다른 관람객의 시선을 신경 써야 될 정도로 감동의 눈물을 쏟은 경우가 두 번이나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서 만난 1890년 작, <아몬드 나무> 와 독일 드레스덴의 신 거장 미술관을 빛내고 있는 오토 딕스의 <전쟁 제단화> 앞에서였다. 남다른 가정환경과 시대적 배경, 독특한 감수성과 개성으로 비극적 삶을 살았던 두 미술가의 승화된 슬픔 앞에서 나의 영혼은 정화되고, 아주 잠시나마 나의 경험과 가치관이 두 대가의 그것에 닿은 듯한 감동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미술로부터 그러한 체험은 쉽게 얻을 수 없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 첫걸음은 익숙함에서 시작된다. 익숙함은 친밀해지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작가의 삶과 작품에 대한 이해와 함께 미술관 문턱을 자주 넘나들어야 한다.

신년 초에 세우는 계획 중에 미술과 친해지기를 하나 넣어 봄직 하지 않을까?

김승환 조선대 시각문화큐레이터 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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