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1조 예산 연구장비 방만 운영 '심각'
토론회서 사용 윤리ㆍ소유형태 등 지적

# 서울 소재 A대학은 물질의 분자구조를 파악하는 데 쓰는 적외선 분광기를 미국 장비업체로부터 1억2800만원을 주고 샀다. 그런데 똑같은 장비를 대전의 모 연구기관은 4분의 1 값인 3400만원에 샀다.

# 모 대학 교수는 작년 연말 연구장비를 한 대 구입했다. 연구비를 다음해로 넘겨 쓸 수 없기 때문에 남아도는 연구비를 처리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이 장비는 다른 연구자에게 개방하지 않고 연구팀만 쓴다.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크게 늘면서 연구시설ㆍ장비 투자가 연 1조원에 달하지만 외산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다 연구자나 기관간 공동활용도 이뤄지지 않아 예산낭비가 심각한 것으로 지적됐다.

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첨단R&D와 연구장비 인프라 구축 효율화' 토론회에서 유경만 국가연구시설장비진흥센터장은 "16조원을 넘어선 올해 국가R&D 예산 중 연구장비ㆍ시설 투자가 1조원에 달하는데 이중 외산이 70%를 차지하고, 연구자의 72%는 다른 연구자와 연구장비를 나눠 쓴 적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연구장비 투자 효율성과 장비 사용 윤리, 소유행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행사는 연구장비ㆍ시설 투자 효율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민병주 의원(새누리당)이 주최하고 과학기술정책연구원과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이 공동 주관해 열렸다.

발표자로 나선 유 센터장은 "현재 국내에서 운영되는 연구장비와 대형연구시설이 총 13조4000억원 규모에 달하고, 매일 30억원씩 투자가 이뤄지는데 투자만 할 뿐 활용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연구생산성 저하와 예산낭비, 외화 유출로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분석결과 국내에는 3000만원 이상 50억원 미만 연구장비만 6만2355점, 7조4070억원 어치가 있고, 50억원 이상인 대형연구시설도 98개에 달하며 투자규모는 약 6조에 이른다. 이들 장비는 연구자가 소속된 기관 소유가 되지만, 해당 연구과제가 끝나면 쓸모가 없거나 운영예산이 부족해 방치되기 일쑤다. 정부 역시 장비 운영을 각 기관에 맡겨두고 손놓고 있다.

연구자들이 장비를 중복 구매하고 공동활용 하지 않는 원인을 분석한 결과 연구과제 종료 전 연구장비를 사는 게 신속하게 예산을 소비하기에 좋고, 경쟁 연구자와 나눠 쓰기 싫다는 심리적 요인과 함께 나눠 써도 인센티브가 없고, 중복 연구장비 파악이 힘들다는 다양한 원인이 있었다. 연구장비를 일단 보유하고 있으면 다른 연구과제 선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이유도 있다.

토론자로 나온 엄창섭 고려대 의대 교수는 "연구자들은 비싼 장비를 사고도 개인소유라고 생각하고 연구과제가 끝나면 돈이 없어서 장비를 놀리면서도 공동활용하지 않는 게 대부분"이라며 "비싼 장비는 연구자한테 사주지 말고 지역별 거점센터를 둬서 공동 운영해 다른 연구자들도 쓰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연구과제가 끝나면 연구장비 활용도를 조사해서 미흡한 장비는 강제로 회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안현실 한국경제 논설위원은 "정부가 매년 연구장비를 1조원 어치씩 수입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국내 연구장비 기업 육성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장비 유지보수ㆍ운영인력을 확충해 고용을 창출하고, 적정 연구비 개념을 도입해 연구자들이 연구비가 남아 급하게 연구장비를 사서 숫자를 맞추는 일을 막는 한편, 보완책으로 다년도 연구비 집행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종우 한국법제연구원 연구관은 "심각한 문제는 연구장비가 정치권의 지역구 사업화돼 가고 있다는 것"이라며 "'가속기 공화국'이라는 말까지 생기고 있는데 연구장비 소유와 관리, 공동활용에 대한 법률적 근거를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 센터장은 "연구장비 유지관리 예산과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연구장비 방치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며 "장비 유지관리와 인력 관련한 국가정책과 연구자들의 문화ㆍ행태가 모두 개선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상목 미래창조과학부 차관은 "연구장비 공동 활용률을 높이고 유지보수 인력을 확충하는 한편 장비를 직접 개발하고 유지보수하는 중소기업을 육성하는 등 종합적인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안경애기자 naturean@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