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원자력 세계 5위 35년간 초고속 발전 지속가능한 원전위해 고칠 곳은 과감히 고쳐야 에너지 안보 차원서 원자력은 계속 달려야
지난 8월 개봉한 <설국열차> 의 누적 관객 수가 9백만 명을 넘어섰다.

천만 돌파는 어렵다고들 하지만 다음 달부터는 세계 160여개 국에서 상영될 예정이라고 하니 참으로 대단하다.

오랜만의 국산 블록버스터인 영화의 유일한 공간 배경은 기상 이변으로 꽁꽁 얼어붙은 지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채 쉼 없이 궤도 위를 달리는 '무한동력'의 열차다.

지구를 1년에 한 바퀴 씩, 17년 동안이나 연료 보급 한번 없이 달리고 또 달리면서 열차에 탄 많은 사람들에게 열과 전기까지 공급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답은 영화 기획에 참여한 컨셉 아티스트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설국열차가 움직이는 동력, 즉 엔진은 '원자력 발전'을 모티브로 스케치됐다.

설국열차는 물론 상상의 산물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도 원자로를 장착한 핵잠수함이 수명 기간인 25년 동안 단 한 차례의 추가 연료 보급 없이도 바다 밑을 누비고 있으니 설국열차가 허무맹랑한 공상과학만은 아닌 셈이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 원자력이 어쩌면 설국열차와 닮은꼴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1978년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1호기가 상업 가동을 시작한 이래 우리나라 원자력 산업은 설국열차보다 곱절이나 긴 35년의 세월을 달려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 연구기관인 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가 설립된 1959년부터 따져보면 그 역사는 반세기를 훌쩍 넘는다.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성장해온 결과 우리 원자력 관련 산업 매출은 현재 연간 20조원에 이르고, 원전 23기를 가동하는 세계 5위의 원자력 발전 강국으로 국내 전력 생산의 30퍼센트 가까이를 원자력을 통해 얻고 있다.

원자력 발전을 통한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도약은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는 선진국 기술에 의존하던 원전 기술 완전 자립에 성공한 데 이어 2009년에는 UAE에 원전 4기를 수출해 일약 원자력 시스템 공급국으로 올라섰다.

지난 반세기 대한민국 원자력은 무서운 속도로 얼음을 깨고 달리는 설국열차와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갑자기 빨간 불이 켜졌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이어 국내 원전 부품 비리가 잇달아 터지면서 원자력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원자력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안전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는 작금의 일들은 원자력계 종사자가 보기에도 충격적이니 국민들의 실망은 오죽할까. 지난 반세기 눈부신 질주를 하면서 외형적으로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룬 우리 원자력계의 내실이 고작 이 정도였는지 자문하게 된다.

레일 위로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떨어져내려 열차가 오도 가도 못하고 막힌 형국이다.

지금이야말로 열차와 레일을 정비할 때다.

안전을 저해할 수 있는 요소가 더는 없는지 모든 인적, 물적 가능성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살펴보고, 고치거나 없애야할 부분이 나오면 과감하게 도려내야 한다.

지속가능한 원자력의 이용을 위해 진작 해결했어야 하지만 계속 미뤄온 사용후핵연료 관리 방안도 이 참에 풀어야 한다.

임시 수조가 포화돼가고 있는 사용후핵연료의 올바른 관리를 위한 국민의 의견을 모으고 전문가의 견해를 더해 국가 정책으로 만들어야할 때다.

정부가 사용후핵연료 처리 방안을 공론화하기로 한 것은 따라서 대단히 시기적절하다.

문제가 많으니 이 참에 원자력이라는 열차를 폐기하자는 분들도 있지만 동의할 수 없다.

에너지는 산업과 경제이기 이전에 안보다.

휴전선을 지키는 안보가 있다면 에너지 수급을 지키는 것도 안보다.

어떠한 말로도 부정과 부패는 정당화될 수 없지만 일부 부패가 있다고 해서 국방을 포기하는 나라나 국민은 없다.

부정부패를 발본색원해서 다시는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확실히 하고 나서는 다시 안보 전선에 서는 것이 옳은 일이다.

영화 속 설국열차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지만 대한민국 원자력은 계속 달릴 수 있고 달려야 한다.

원자력계 종사자들 모두 대오각성해서 실추된 안전 신화와 국민 신뢰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다면 원자력이 국가경제와 산업 발전의 진정한 '무한동력'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정연호 한국원자력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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