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시대…정확한 예측 자체가 불가능
지난해 우리의 경제성장률은 3.8%였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물론이고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민간경제연구소의 경기 예측이 모두 터무니없는 장밋빛 부풀리기였던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겉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출과 내수 시장의 흐름에 대한 정부의 예측은 현실과 정반대였다. 시장의 불확실성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경제 전문가들의 변명은 옹색한 것이다. 증권사의 주가 예측도 전혀 믿을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아내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의 원초적 욕망이다. 미래 예측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도 다른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밤과 낮이 반복되고,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폭설이 쏟아지는 이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시절의 자연은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 인류에게 미래 예측은 가장 확실하고 현실적인 생존 수단이었다. 미래 예측의 정확성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신비를 앞세운 주술사나 종교적 권위를 강조하는 예언가들의 황당한 거짓말과 허풍에 속아넘어가기도 했고, 재산과 목숨을 포기하는 희생까지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자연의 공포를 극복하고, 목숨을 지키려면 사랑하는 가족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엉터리 예측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17세기 근대 과학의 등장으로 인간의 미래 예측 기술은 혁명적으로 달라졌다. 해와 달, 그리고 5개 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고전역학은 인류 역사에서 엄청난 성과였다. 그런 고전역학의 위력은 대단했다. 세상 모든 것의 움직임이 고전역학으로 완벽하게 설명되는 것처럼 보였다. 물결이나 음파와 같은 파동도 설명해주었고, 전기와 자기(磁氣) 현상도 설명해주었다. 19세기는 세상 만사가 확실한 인과법칙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다는 '결정론'의 세기였다.
오늘날 경기 예측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결정론적 세계관이 절정에 이르렀던 19세기의 수준이다. 충분한 정보만 확보하고, 충분한 계산 능력만 갖추기만 하면 경기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작년과 같은 경기 예측 실패는 시장에 대한 정보 수집에 게으름을 피웠거나 계산 능력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생긴 단순 실수로 여긴다. 시장의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인력과 비용을 보장해주기만 하면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믿음에서 시작된 불똥이 과학기술 분야로 튀기도 한다. 지난 9.15 전력 대란이 그런 경우였다. 한전과 전력거래소의 실무자들이 매뉴얼에 따라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력 대란이 일어났다는 것이 정부의 결론이었다. 심지어 태풍이 육지에 상륙하는 시각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기상청이 뭇매를 맞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할 수는 없다. 실제로 19세기 말에 이르면서 결정론적 세계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확률적 결정론이 적용되는 양자역학이 등장했다. 20세기 중엽에는 움직임의 초기에 존재하는 사소한 차이가 거대한 태풍으로 증폭되는 나비 효과의 가능성도 확인되었다. 이제는 사소한 잡음으로 여기는 요동(搖動)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는 복잡계의 존재도 밝혀졌다. 필연보다 우연이 더 일반적이라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이제 확실성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는 것이 노벨 화학상 수상자 일리야 프리고진의 분명한 주장이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서 정보를 수집하고 노력을 해도 경기와 수요 예측은 빗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확실성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평형에서 크게 벗어난 비평형, 비선형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덕환(서강대 교수, 대한화학회 회장)
지난해 우리의 경제성장률은 3.8%였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물론이고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민간경제연구소의 경기 예측이 모두 터무니없는 장밋빛 부풀리기였던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겉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출과 내수 시장의 흐름에 대한 정부의 예측은 현실과 정반대였다. 시장의 불확실성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경제 전문가들의 변명은 옹색한 것이다. 증권사의 주가 예측도 전혀 믿을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아내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의 원초적 욕망이다. 미래 예측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도 다른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밤과 낮이 반복되고,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폭설이 쏟아지는 이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시절의 자연은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 인류에게 미래 예측은 가장 확실하고 현실적인 생존 수단이었다. 미래 예측의 정확성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신비를 앞세운 주술사나 종교적 권위를 강조하는 예언가들의 황당한 거짓말과 허풍에 속아넘어가기도 했고, 재산과 목숨을 포기하는 희생까지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자연의 공포를 극복하고, 목숨을 지키려면 사랑하는 가족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엉터리 예측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경기 예측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결정론적 세계관이 절정에 이르렀던 19세기의 수준이다. 충분한 정보만 확보하고, 충분한 계산 능력만 갖추기만 하면 경기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작년과 같은 경기 예측 실패는 시장에 대한 정보 수집에 게으름을 피웠거나 계산 능력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생긴 단순 실수로 여긴다. 시장의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인력과 비용을 보장해주기만 하면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믿음에서 시작된 불똥이 과학기술 분야로 튀기도 한다. 지난 9.15 전력 대란이 그런 경우였다. 한전과 전력거래소의 실무자들이 매뉴얼에 따라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력 대란이 일어났다는 것이 정부의 결론이었다. 심지어 태풍이 육지에 상륙하는 시각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기상청이 뭇매를 맞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할 수는 없다. 실제로 19세기 말에 이르면서 결정론적 세계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확률적 결정론이 적용되는 양자역학이 등장했다. 20세기 중엽에는 움직임의 초기에 존재하는 사소한 차이가 거대한 태풍으로 증폭되는 나비 효과의 가능성도 확인되었다. 이제는 사소한 잡음으로 여기는 요동(搖動)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는 복잡계의 존재도 밝혀졌다. 필연보다 우연이 더 일반적이라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이제 확실성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는 것이 노벨 화학상 수상자 일리야 프리고진의 분명한 주장이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서 정보를 수집하고 노력을 해도 경기와 수요 예측은 빗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확실성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평형에서 크게 벗어난 비평형, 비선형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덕환(서강대 교수, 대한화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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