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승 한국원자력연구원장
중소형 원전 SMART(스마트)를 개발하고 있는 한국원자력연구원 스마트개발본부 건물 입구에는 대형 화면에 시-분-초를 보여주는 시계와 함께 연말까지 남은 날짜가 큰 글씨로 비춰지고 있다. SMART는 우리나라 독자 기술로 개발하고 있는 중소형 원전으로, 원자로 1기로 인구 10만 명 규모의 도시에 전력과 물을 동시에 공급할 수 있는 신개념 원자로다. 오는 2030년까지 최대 350조 원으로 예상되는 중소형 원전 세계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각국이 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SMART는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부터 당당히 '기술적으로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 원자력의 새로운 '기대주'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지난 1997년부터 수행해온 SMART 기술 개발을 올해 말까지 마무리짓고, 2011년 말까지 인허가를 받아 새롭게 열릴 중소형 원전 세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시간은 촉박하고 할 일은 산더미지만, 반드시 해내겠다는 각오만은 모두들 대단하다.SMART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연구원의 한 간부는 얼마 전 휴대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꿨다.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고 받을 때마다 SMART 개발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다.

그런가 하면 연구용 원자로 해외 수출을 이끌고 있는 연구원의 또다른 간부는 몇 년 전부터 휴대폰 배경 화면으로 쓰던 가족 사진을 지우고 대신 거북선 사진을 올려놓고 있다. 지금은 세계 최고를 호령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조선업계가 막 걸음마를 떼던 시절 변변한 조선소 하나 없는데도 유럽으로 날아가 거북선을 보여주면서 배 2척을 수주한 기업인의 일화는 유명하다. 그 때 조선업처럼 원자력도 50년 전에는 기술도 부족하고 자본도 없어 외국 기술, 외국 제품에 외국 돈까지 빌려 연구용 원자로를 지어 최첨단 학문인 원자력 연구개발을 시작했다. 50년, 반세기라는 실로 긴 세월 동안 흘린 땀의 결실로 세계가 알아주는 원자력 선진국이 됐지만, 막상 세계 시장에 우리 원자로를 내다팔려 하자 선뜻 사주려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가슴에 새기고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린 끝에 지난해 말 우리는 요르단 연구용 원자로 건설사업을 수주, 사상 첫 원자력 시스템 일괄 수출이라는 꿈을 이뤄냈다.

21세기 대한민국 원자력 과학기술인들은 원자력 선진국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기초과학 연구 뿐 아니라, 내수산업이던 원자력을 수출산업화해서 조선과 반도체에 버금가는 수출성장동력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태생이 연구자, 기술자라 사업 관련 지식도 경험도 부족하지만 순수한 열정과 뚜렷한 목표의식만을 믿고 연구와 사업의 테두리를 넘나들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연구원을 이끌고 있는 기관장으로서 과학도, 공학자의 길을 선택했을 때 실험실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노벨상에 도전하는 꿈을 꿨을 많은 후배 과학자들을 뜻하지 않은 길로 내모는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다. 연구개발에, 사업 진도 점검 회의에 쉴 틈을 찾기 힘든 한 후배의 입에서 "가정과 취미생활은 깨끗이 포기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진심으로 안쓰러웠다.

그러나 돌아보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20년을 앞서 산 우리 선배들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외국 기술과 도면으로 지어진 원자력 발전소를 바라보면 한없이 자괴감을 느낀 선배들은 연구실 문을 박차고 나가 핵연료 국산화, 한국표준형원전 개발 사업에 몸을 내던졌다. 분초를 다투며 기술을 개발해 놓고도 '국산'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설움을 곱씹기도 했지만 굴하지 않고 기술을 제품으로 완성, 우리 손으로 만든 원자력 발전소에 불을 밝혔다. 그 때 선배들이 땀으로 흘린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이 바로 요르단 연구로 수출과 UAE 상용 원전 수주다.

'주역'에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는 말이 있다. "지나간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보내는 인내와 고뇌의 시간들이 훗날 반드시 큰 결실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원자력계 뿐 아니라 이 땅의 과학기술인들 모두 흔들림 없이 주어진 소명을 다해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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