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점사이클 맞물려 이중고… "국산제품 우선구매가 최선책"


"1997년 환란 때도 이렇게 앞이 깜깜하진 않았습니다. 매일같이 대책회의를 하고 있습니다만,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밤에 잠도 오질 않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도 좀처럼 안됩니다." (국내 LCD 장비제조 A사 대표)

"반도체 LCD 후방 산업계에 올 겨울부터 혹독한 시련기가 찾아올 것입니다. 건실한 중견 후방업체도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고, 중소 후방산업체들은 '줄도산'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국내 반도체 장비제조 B사 대표)

대표적인 수출 품목인 반도체와 LCD의 후방산업이 내년 '붕괴'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반도체와 LCD를 직접 생산하는 양대 산업이 시황 악화에 따라 내년 동시 감산과 함께 설비투자를 대폭 축소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관련 장비ㆍ부품ㆍ재료 등 국내 후방 산업계는 지금 비장한 긴장감 속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 모드'로 전환하고 있다.

"살아 돌아오라." 모 반도체 소자 업체 임원이 자사 협력사 CEO들에게 던진 말이 현 다급한 심정의 정곡을 찌른다.

특히 반도체 불황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LCD 경기의 저점 사이클과 함께 맞물렸다는 게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 반도체와 LCD 장비나 부품재료 사업을 함께 하는 후방 산업체들의 시름이 더 깊어지고 있다. 과거엔 반도체 경기가 좋지 않을 때 그나마 LCD가 호황이어서 견딜 수 있었지만, 이젠 이마저도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또 과거 국내 반도체 LCD 설비투자가 줄어들면 해외 시장에서 활로를 모색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세계 실물경기가 꽁꽁 얼어붙기 시작하고 있어 해외 반도체 LCD 기업들도 내년에 과감한 설비투자에 나설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내년 상반기까지는 선뜻 설비투자에 나서는 반도체 LCD 기업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후방 산업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키코(KIKO) 가입으로 피해를 본 반도체 LCD 후방업체들도 의외로 많다. 가뜩이나 실적이 반토막 나고 있는데 환율 폭등에 키코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곡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반도체 후방산업 사상 최악 불황=일단 반도체 후방산업의 피해가 LCD보다 더 커 보인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세계 메모리 시황 악화로 설비투자 위축이 LCD보다 올해 먼저 나타났기 때문이다. 올해만 고통을 넘기면 회복할 것이라 믿었던 반도체 후방 산업계는 메모리 시황 개선이 내년에도 불투명하고, 이에 따라 삼성전자 하이닉스 등 반도체 소자기업이 내년 투자를 올해 대비 상당부분 줄일 것으로 예상되면서 좌절하고 있다. 이미 반도체 후방산업 업종에 포함되는 대표 기업들이 적자로 돌아섰거나, 전년대비 매출이 절반가량 떨어졌다.

한 반도체 장비업체 CEO는 "수십년간 장비 사업을 해왔지만, 이번처럼 반도체 불황기간이 긴 것은 처음"이라며 "보통 1년 정도면 불황기가 끝났는데, 이번엔 지난해부터 시작된 반도체 불황이 내년까지 3년째 이어질 것이 확실해 보인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메모리 시황은 갈수록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D램 주력제품인 1Gb DDR2 제품의 10월 하순 현재 고정거래가격은 1.31달러로 올 상반기에 비해 반토막 수준으로 사상 최저치를 계속해서 갈아치우고 있고, 낸드플래시 주력제품인 8Gb MLC 제품도 10월 하순 1.61달러로 역시 최저로 바닥이 뚫린 상태다.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권오현 사장은 최근까지 "올해 계획했던 7조원 이상 투자는 예정대로 집행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24일 3분기 실적발표에선 주우식 부사장이 "올해 메모리 7조원 투자는 당초 계획에 미치지 못할 것 같고, 수천억원 정도의 장비설치분이 내년으로 이월될 것 같다"고 말했다.

삼성은 내년 반도체 투자계획을 아직 수립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반도체 후방산업계에선 삼성이 내년 반도체 투자를 올해 7조원의 절반도 하기 힘들 것이란 얘기를 공공연히 하고 있다. 예년 같으면 삼성전자는 10월말 정도에 이미 내년 사업과 투자계획을 마련하고, 내년 설비투자시 반입할 장비를 협력사에 미리 구두 발주하는 게 관례지만, 올해엔 이런 장비 선발주가 실종된 상태라고 반도체 장비 업계 관계자들은 전했다.

하이닉스 협력사들은 더 아우성이다. 삼성전자 반도체총괄은 그래도 적자를 모면하고 있지만, 하이닉스는 지난 4분기부터 올 3분기까지 4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는 등 내년 투자 여력이 바닥 수준이기 때문이다.

최근 김종갑 하이닉스 사장은 "내년 투자는 EBITDA(세전ㆍ이자지급전이익) 범위 내에서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반도체 협력사들은 이것을 이익이 나지 않으면 사실상 투자를 기대하기 힘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LCD 후방산업, 호황 뒤 바로 극심한 불황=LCD 후방 산업계도 내년 몰려올 극심한 한파에 몸서리를 친다. 삼성전자, LG디스플레이 모두 내년 설비투자액을 올해 대비 대폭 삭감할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내년 LCD 투자계획을 구체적으로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미 후방 산업계에는 올해 4조원 이상 투자에서 내년엔 절반으로 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최근 권영수 사장이 올해 4조원 투자에서 내년 2조원 이하로 역시 절반 가량 줄일 것이라고 기자들과 만나 밝혔다.

이미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가 올해 예정했던 장비 반입을 내년으로 일정 부분 연기했고, 당초 계획했던 내년 8세대 또는 11세대 등 신규 라인 건설과 증설 계획도 없어지거나 대폭 축소할 것이라는 게 LCD 후방산업체들의 예상이다.

해외 시장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올해 공격적인 투자로 한국 LCD산업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대만 LCD 제조사들도 내년 투자를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 AUO가 당초 내년 하반기 가동을 목표로 했던 7.5세대 증설라인 가동시기를 2010년 이후로 투자계획을 연기시키는 등 올 하반기와 내년 투자 계획을 잇따라 축소하고 있다.

LCD 장비업체 CEO는 "최근 LCD 호황에 따른 설비투자 확대로 국내외서 수주한 매출 잔고가 아직 남아있지만, 내년 1분기면 사라질 것"이라며 "이후엔 극심한 수주 가뭄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산 구매율 높여 후방산업 붕괴 막아야=튼튼한 후방산업의 지원이 없다면 반도체 LCD 전방 산업도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내년 뿌리 채 흔들릴 반도체 LCD 후방산업에 대한 가장 좋은 대책은 '국내 협력사 제품 우선 구매'라는 카드다. 현재 국내 반도체 LCD 제조사들의 국산 제품 구매율은 30% 안팎으로 저조한 편이다.

대표적인 반도체ㆍLCD 장비 업체의 CEO는 "전방 산업체가 경기악화로 투자를 줄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정해진 투자계획 집행시 국내 제품 구매율을 높여주는 게 중소 협력사를 살리는 최선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룡기자 sr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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