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낙영 디지털산업부장


팹리스 산업이 중요한 전환기에 접어들고 있다. 최근 몇 년간 급속한 성장을 하며 규모를 갖춰가고 있는 팹리스 업계가 하나의 산업군으로 올라서느냐, 아니면 연구개발 중심의 소규모 사업체들의 영역으로 남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팹리스는 사실 요즘 들어 널리 불리며 일반화됐지만 용어 자체도 어렵고 생소한 영역이었다. 과거에는 비메모리반도체 혹은 주문자설계반도체(ASIC) 등으로 불려왔다. 쉽게 말하면 자체 생산시설 없이 반도체를 설계하고 개발하는 것이다. 퀄컴이나 ATI, 엔비디아 등 대표적인 팹리스 업체들을 떠올리면 그나마 이해하기 쉽다.

여하튼 앞서 언급한 기업들의 매출은 모두 조 단위 규모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외국에선 산업군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국내 팹리스 업체들이 이같은 규모로 성장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우선 국내 팹리스 업체들이 공략하고 있는 시장을 보면 충분히 가능성을 갖고 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자 산업이 빠르게 옮겨가면서 이들 글로벌 업체들이 점령하고 있지 않은 영역에서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현재까지 팹리스 업체들의 성장동력 역할을 해왔던 휴대폰의 다양한 애플리케이션들이다. 국내 팹리스 업체들은 카메라폰이나, 뮤직폰, DMB폰 등의 핵심 칩들을 통해 성장을 해왔다. 이들 애플리케이션은 휴대폰을 넘어 독립된 디지털단말기, 예를 들면 디지털카메라라든지, MP3P, DMB기기 등 큰 시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조 단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개별 기업들이 규모의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D램하면 삼성, CPU하면 인텔처럼, 한 영역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해야 할 필요성은 팹리스 업체가 더욱 크다. 통신의 퀄컴, 그래픽칩의 ATI나 엔비디아처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선 기술로 시장을 선점하고, 이끌고 가는 것이 필수겠지만 글로벌화된 시장 경쟁과 현재 국내 업체들의 상황을 봤을 때 업체간 우호적인 인수합병(M&A)이 해법이다.

국내 팹리스 기업들 중 일부 선두 기업들이 올해 매출 2000억원 대를 돌파할 것으로 보이지만, 대부분은 아직 수 백억원 대에 머무르며 히트 제품(칩)의 대박을 꿈꾸며 연구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자연히 히트 칩을 낼 가능성이 커 보이는 분야에 몰릴 수밖에 없다. 웬만한 팹리스 업체치고 DMB칩이나 통신용 칩을 안 하는 곳이 없을 정도로 몇몇 분야로의 쏠림 현상이 심하다.

이는 업계 전체로 봐서 인력을 포함한 개발 능력 등 리소스를 허비하는 것이다. 설령 한 두 기업이 경쟁력 있는 좋은 칩을 만들어 냈다고 하더라도, 이를 팔기 위한 마케팅과 세트업체와의 협상에서 조 단위의 글로벌 기업들과 힘겹게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또 한 두 제품에서 대박을 내 수천억 대의 규모로 올라선 다음에는 더욱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지속적인 히트칩의 개발과, 새로운 영역의 도전이다. 이를 위해서는 M&A를 통해 특정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춘 작은 팹리스 기업들을 흡수해야 한다.

팹리스는 작고 가벼우면서도 부가가치가 높다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것을 개발하는 것보다 개발능력이 검증된 작은 기업을 인수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그것이 인수하는 곳이나 당하는 곳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길일 수도 있다.하지만 팹리스 업계 전반의 인식은 아직도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하겠다는 생각이 많은 것 같다. 지금은 작지만 언젠가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큰 꿈을 버리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팹리스 업계의 시장 가치가 저평가돼 있고, 이에 따라 자금 규모 역시 글로벌 시장의 경쟁업체들에 비해 턱없이 작은 상황에서 힘을 합쳐 한 두 개라도 규모를 갖춘 기업을 만들어야 한 산업군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또 기업들이 M&A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의 보완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세제나 금융에서 M&A를 활성화하고 유도할 수 있는 현실적인 지원들도 좀더 나와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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