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는 삶에서 창조적 아이디어 번득인다


아케이드게임업체인 디지털실크로드의 김동현 사장은 콧수염을 기른다. 91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시스템공학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 들어간 직후부터 작심하고 기른 것이 벌써 12년째.

"출연 연구소에 있다 보니 사고가 경직되더군요. 고민 끝에 '튀자'고 결심했습니다. 그 방법이 수염이었죠. 사규를 다 뒤졌는데 수염을 금지한 조항이 없어서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콧수염만 기르기로 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일본에서 컴퓨터그래픽을 전공한 그는 94년 영화 '구미호'의 특수효과를 맡을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가. 개인자격으로는 일본을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문제는 한국의 게임산업. 한국이 일본 게임산업을 앞지르는 날, 그는 나머지 턱수염까지 기를 작정이다. 만일 목표달성에 실패하면? 콧수염을 밀어버리겠단다.

수염은 강렬한 자기 표현이다.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그렇다. 수염은 외모나 신체상의 특징, 여타 개성을 압도한다. 자연스레 그 사람의 '트레이드마크'가 돼 버린다. 누구를 지칭할 때 '수염 기른 사람' 하면 '아~ 그이' 할 정도다. 아는 이 사이엔 '털보'나 '코털'로 통한다. 수염을 기르는 것은 그만큼 '튀는' 짓이다.

CEO라고 크게 다를 바 없다. 회사 내에서는 뭐랄 사람 없다지만 바깥에서야 어디 그런가. '처음 만나는 이건 그전에 알던 이건 수염에 대해 넌지시 물어온다'는 게 수염 기른 CEO의 공통경험이다. '길가다 돌아보는 사람도 있고 어딜 들어가면 눈길이 확 쏠리는 걸 느낄 수 있다'고도 한다. 연예인이 아닌 다음에야 편할 리 없다. 그럼에도 굳이 수염을 기르는 CEO가 한둘이 아니다.

대기업에 다니던 정철흠 야인소프트 사장은 2001년 3월 회사 창립과 함께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개발자 출신인 그는 회사에서 먹고 자면서 리포팅 솔루션 개발에 직접 매달렸다. 수염 깎는 일조차 귀찮아지면서 자연스레 회사이름처럼 '야인'다운 면모를 갖추게 됐다. 업계 '중앙무대' 격인 대기업에 몸담았을 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사장은 "머리는 까만데 수염만 하얗게 나니까 주변에서 더 권위 있어 보인다고 말한다"며 "한번 보면 사람이 잘 잊어버리지 않아 덕을 보고 있다"고 수염 예찬론을 늘어놓는다. 일상생활에 불편한 점도 있지만 사업에는 도움이 된다나.

정사장의 회사는 지난해에 솔루션 개발을 완료하고 웅진코웨이에 납품하는 등 기틀을 다지고 올해는 본격적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그 역시 '야인'에서 중앙무대로 화려하게 진출할 날을 꿈꾼다. "업계 중심에 서면 수염을 자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수염은 정사장에게 성공을 향한 집념의 표출이다.

게임 유통업체 비스코 임태주 부사장도 회사를 옮기면서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경우다. 수염경력 4개월. 그전 직장에서도 수염을 기르고 싶었지만 그때는 경영진이 아닌 일반직원의 입장이어서 눈치가 보였다. 징크스도 작용했다. 그는 지금 회사에 전환점이 될 수도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프로젝트가 성사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수염에 깃들어 있다.

털이 남보다 빨리 자라는 그는 1주일에 한번씩 정성스럽게 수염을 다듬는다. 쓱쓱 전기면도기로 밀기만 하던 예전에 비해 손이 많이 간다. '수염 기를 자유'를 누리는 만큼 더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초창기 인터넷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한 전 아이네트 허진호 사장. 현재 아이월드네트워킹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그는 PSI넷에 아이네트를 매각한 지난 99년 '털보' 대열에 합류했다.

허사장은 회사를 매각한 후 처음으로 홀가분하게 떠난 출장 겸 가족여행길에서 그만 수염 기르는 맛을 알았다. 부인도 '기르는 것도 괜찮다'며 방조했다. 그때부터 주위 눈치봐 가며 길렀다 자르기를 반복하다가 2000년 가을부터 아예 붙박이로 나섰다.

"반응은 반반이었습니다. 주로 나이 드신 분은 싫어하는 반면 여성은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허사장은 평소에도 알아주는 멋쟁이다. 예전부터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상별로 넥타이를 구비해놓고 그때그때 분위기를 맞춘다. 젊은 직원 따라 일명 '브릿치'(머리부분염색)도 해봤다. 이제 그의 멋의 핵심은 수염이다. 허사장은 "갈수록 하나 이상의 트렌드가 공존하는 형태로 우리사회가 바뀌어 나가고 있다"며 "다양한 멋과 스타일이 보편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근엄한 CEO. 권위와 격을 내세운 '개성 없는 멋'으로 일관하는 CEO는 양재현 넥서스커뮤니티 사장의 '표현욕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양사장은 수염과 함께 새 천년을 시작했다. 그에게 수염은 "다르게 살고 싶은 욕구, 혹은 다르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99년 겨울 뉴욕 첫 방문, 타임스퀘어에서 목도한 자기만의 개성이 살아 있는 뉴요커의 모습은 그를 자극했다.

2001년 1월1일에는 왼쪽 귀까지 뚫었다. 내성적인 사람은 금귀고리를 단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수염 기른 CEO는 쉽게 용납됐지만 귀고리를 한 CEO에 대해서는 휠씬 더 부정적이다. 양사장은 "수염보다 귀고리가 '아웃사이더' 특성이 강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주주와의 만남에 귀고리를 하지 말 것을 은근히 요구하기도 했다. 성화에 못 이겨 장례식장에 갈 때만 그는 귀고리를 슬쩍 풀어놓는다. CEO라는 사회적인 지위가 오히려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짓누르고 있는 셈이다.

"회사에 모든 것을 바치는 CEO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사 일만 가지고 열정을 다 소화할 수 없는 이도 있습니다. 일에만 빠져서는 동기부여도 없고 충전도 할 수 없습니다."

CEO는 권한 만큼이나 책임이 따르는 자리다. 최고의 자리에서 자기 마음껏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래서 남의 눈을 더 의식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동안 CEO들이 판에 박은 듯 개성 없는 모습을 연출한 이유이기도 하다.

수염 기른 CEO는 그런 면에서 개성과 의지가 강한 사람이다. 수염은 자기를 드러내는 행위다. 대중 앞에서 '나는 개성강한 사람'이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주위에 휘둘리지 않는 강렬한 개성과 의지는 그들의 밑천이기도 하다. 김동현 사장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정부에 게임산업 육성사업계획서를 들이밀어 '게임산업개발원'을 만들었다.

CEO의 개성과 멋은 회사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촉매제이기도 하다. 양사장은 지금 코넷(악기이름)을 배우러 다닌다. 직원과 록그룹을 결성, 정기적으로 노래연습도 한다. 개개인의 멋과 스타일이 보장되는 건강한 사회가 그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IT사업의 성공여부는 기획력이고, 기획력은 바로 아이디어입니다. 개성과 멋이 살아 있는 삶에서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허진호 사장의 말처럼 수염에서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일까.

권정숙기자.사진=김민수기자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