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우 저

학고재 / 9500원

40년 가까이 국립박물관에 몸담으며 시대 최고의 감식안으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었던 혜곡 최순우 선생의 유고 산문집이 나왔다. 몇 년 전에 출판되었던 유고선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한국미술사 백과사전과 같이 두고두고 펼쳐보며 유적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일깨워 주는 책이라면,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는 한국미의 정수가 무엇인지, 아름다움을 감식하는 혜곡선생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짧은 산문집이다.

여타 글쓰기와는 달리 산문이란 그것을 읽는 이들에게 말을 거는 행위이자 곧 그들의 속내이야기, 일렁이는 감정에 진지하게 귀 귀울이고 바라보는 행위인 것. 혜곡 선생의 정갈한 산문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다 보면 마치 노현자의 명상속에 들어와 그와 더불어 세계를 다시보는 것과 같다. 그의 시선은 텅 빈 가지가 달빛을 받아 창호지 문에 그려주는 추상화, 시든 가을 풀숲에서 피어난 용담꽃 한송이, 뜰앞에 널부러져 있는 다디미돌과 같이 주변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향해 있고, 그 시선이 지나간 자리는 짧지만 깊은 여운을 남기는 감성과 철학이 녹아난다.

특히 혜원 선생의 한국 백자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다. 한국자기의 미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선량하고 조용한 아름다움이며, 이것이 늘 소박하고 조용하게 작품 위에 반영되어 왔다. 한국 도자기에 나타난 이러한 미의 특색은 물론 한국의 풍토와 역사를 배경으로 한 한국 사람들의 성정, 그리고 경제 사회의 입지조건에 정직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무심하고 소박한 자기들의 담담한 자세는 마치 정갈하고 순직한 조선 백성들의 마음과 같으며, 어느 도공의 손이 빚어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산천이 낳아준 것이라고나 할까.

진정 아름다운 것은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법. 무심히 지나치는 고옥의 문창살에서 혜곡선생은 ’추상’으로 대변되는 모더니즘의 단초를 본다. 창살면의 분할에서 오는 쾌적한 시각의 아름다움은 근대 미술에서도 하나의 참신한 면으로 개발되어 왔으며 그중에서도 몬드리안 같은 사람은 그러한 시도에서 성공한 예술가의 하나였지만, 조선 목수들의 손으로 가누어진 한국 창살무늬의 아름다움은 때로는 몬드리안의 작품을 능가할만큼 세련된 면의 분할을 보여 주었다.

산문을 쓰는 이와 읽는 이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얽힘과 스밈이 긴밀할 때, 비로소 글은 생명력을 얻게 된다. 작고한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에도, 혜원 선생의 산문이 이토록 싱싱게 다가오는 것은 글 사이사이에 묻어나오는 진실성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한국 미술사에 전혀 문외한인 독자들도 여러 단상들의 결과 무늬를 따라가다보면 한국미의 본바닥을 흐르는 선과 음율의 흥겨움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이연희 / 아랍은행 심사역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