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설계 업체인 A사의 K사장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시스템온칩(SoC) 솔루션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수익을 내지못해 사업이 중단되면서 15년간 몸 담았던 회사를 나와 창업했다. 기다려주지 못한 회사에 대한 야속함보다 이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한다는 도의적 책임감이 그를 창업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재학시절 내내 수재소리를 들었던 T사의 C사장도 여러 개의 칩으로 이뤄진 위성방송 수신용 모듈을 원칩화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회사가 개발을 포기하면서 사표를 내고 나와 개발작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K사장이나 C사장만이 아니다. 반도체설계 업계에는 자신이 속해있던 사업부가 진행하던 개발사업이 중단되자 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퇴사해 창업을 통해 개발작업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자원이 한정돼 있는 상황에서 한 기업의 ‘선택’과 ‘집중’을 무턱대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 반도체설계 엔지니어들이 ‘선택받지 못한 사업’을 들고 나와 목표했던 개발물을 내놓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대기업은 ‘속성재배’를 너무 선호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발의 기쁨도 잠시, 벤처 설계업체의 엔지니어 사장들은 곧이어 마케팅과 영업이라는 장벽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기술과 영업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밤을 새워 가며 개발한 칩이 인지도에서 밀려 시스템업체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면 업체들은 결국 원치 않던 시스템 제조에 매달리기도 한다. 칩에 목숨을 걸겠다던 초창기 다짐도 자의반 타의반 허물어지게 된다. 회사 유지가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투자문제로 만나게 되는 증권사의 20~30대 애널리스트들은 1~2년 내에 최소한 어느 정도의 매출이 가능하냐며 이 사장들을 다그치기 일쑤다. 그리고 기자들은 시스템 제조에 눈돌리지 말고 칩 사업이나 잘하라는 쓴소리를 내뱉곤 한다.

우리 대기업들의 ‘속성재배’ 풍토만 아니었어도 보다 빠르게 성공했을 SoC 제품이 훨씬 많지 않았을까.

〈허정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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