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2년은 IT업계, 특히 인터넷 업계에 ‘혹한기’였다. ‘뉴 밀레니엄’의 꿈은 산산조각났고, 경기부침 없이 고속성장만 지속할 것이라던 ‘신경제’의 환상도 여지없이 무너졌다. IT업계는 과잉투자·과잉생산에 따른 재고 누적으로 몸살을 앓았고, 인터넷 업체들은 수익 모델을 마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2년을 보낸 지금, IT업계에는 회생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통신서비스·단말기·TFT―LCD·게임·홈쇼핑 업체들은 이미 회복세에 접어들었고, ‘닷컴 거품론’의 직격탄을 맞았던 인터넷 업계도 선발업체 중심으로 뚜렷한 수익성 개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통신장비·네트워크 장비업체들이 상대적으로 뒤늦은 회복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이들도 올해 말쯤에는 회복세로 돌아설 것이란 전망이 우세한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국내 벤처업계의 대표주자들을 초청해 지난 2년간 IT업계를 조명해보고, 최근 현황과 향후 전망을 심층 점검했다.
〈편집자〉
장소: 디지털타임스 본사 7층 회의실
참석자: 박흥호 나모인터랙티브 사장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사장
이해진 네이버 사장
허진호 아이월드 사장
사회자: 박재권 디지털타임스 경제과학부 차장대우
사회자〓먼저 지난 2년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한번 짚어보기로 하자. 2000년 벽두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닷컴 거품론’이 IT산업 전반에 대한 ‘거품론’으로 인식되면서 IT업계가 깊은 수렁에 빠졌다. 그 과정에서 IT업체들이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벤처기업들은 생존의 위협까지 느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었나.
허진호〓 IT산업의 거품 형성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2000년부터 본격화된 IT산업의 거품 제거는 IT기업에 대한 사고를 정상으로 돌려놓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고 본다. IT산업 이상 과열로 과대평가됐던 기업들의 가치가 제자리를 찾음에 따라 매출, 영업이익 등 수익성이 중시되는 풍토가 조성됐다. IT기업도 성장성 못지 않게 견실한 수익구조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됐다.
벤처기업의 자금 조달 환경이 마련된 점도 긍정적이다. 코스닥시장은 벤처기업들이 마케팅 능력과 기술력을 향상시키는데 필요한 자금조달 창구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그 덕분에 벤처가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가 마련되었다고 본다.
안철수〓단기적으로 보면 지난 2년은 최악의 시기였고, 지금도 고생이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는 계속해서 증가해왔고, 기업을 하기 위한 환경도 확실히 좋아졌다. 98년 이전에는 ‘벤처 투자’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 아닌가.
사회자〓사실 IT산업의 거품은 세간의 과도한 기대감에서 비롯됐고,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이 인터넷 산업이었다. 구체적으로 포털·보안솔루션·소프트웨어 업종은 현재 어떤 상황인가.
이해진〓닷컴 기업을 운영하는 사장들은 지난 2년간 지나친 낙관론을 경계하고 내실을 다지려는 노력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닷컴기업 대망론’을 외치며 앞서나갔던 사람들이 닷컴기업들의 성장성에 회의를 품고 ‘닷컴 무망론(無望論)’으로 돌아섰음에도, 많은 닷컴기업들은 이 같은 시대 조류에 편승하지 않고 꾸준히 ‘비즈니스 모델’을 마련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여왔다. 그 성과가 최근 들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터넷 보급의 확산과 이용자 확대에 힘입어 일부 닷컴 업체들이 흑자를 시현하는 등 수익성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
안철수=과잉 투자와 과잉 생산으로 인한 IT산업의 거품 해소과정은 3가지 측면에서 상당히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먼저 선진국에서는 상식으로 통하지만 지난 2년간 우리나라 벤처기업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던 수익모델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된 점이다. 벤처기업이 정도(正道) 경영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또 경기침체를 경험하면서 위기관리 시스템이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는 경영의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큰 수확이다. 솔직히 그동안 벤처기업은 고성장에 만취돼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자생력 배양에는 소홀히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IT혹한기의 경험을 토대로 많은 벤처기업들이 위기관리시스템 마련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벤처기업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자리잡은 것도 중장기적으로 벤처기업의 성장에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벤처기업이 대규모 자본을 유치하거나 우수한 인력을 충원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벤처기업이 국내산업의 한 축으로 이해되면서 코스닥 등록을 통한 대규모 자금확보가 가능해졌고 일류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이 벤처기업으로 몰려들어 인력확보 환경도 크게 개선됐다.
박흥호=안 사장의 말처럼 기업의 수익모델은 기업의 가치를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다. IT기업의 거품은 수익모델보다는 성장성을 지나치게 부각시킨 결과이다. 결국 개별 기업들조차도 자기 회사의 적정한 기업가치를 산정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고 투자자들 역시 회사의 수익성을 검증하기보다는 성장성만을 좇아 무분별하게 투자했던 점이 IT거품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
하지만 최근 수익모델에 따라 기업의 옥석이 가려지면서 IT기업의 가치산정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다만 투자자들이 개별기업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단기 투자에만 열중하는 것은 여전히 아쉬운 점으로 꼽을 수 있다.
사회자=현재 IT업계의 버블은 완전히 걷혔다고 보는가.
허진호=미국 나스닥 기업들의 평균 주가수익비율(PER)은 현재 10~15배로 지난 10년 평균 PER보다 여전히 10% 정도 높은 수준으로 알고 있다. 아직도 거품이 완전히 해소된 상태는 아니라는 얘기다. 코스닥 기업들의 평균 PER도 미국 나스닥 기업과 비슷해 코스닥기업들의 기업가치가 정상을 찾아가고 있지만 완전히 제거됐다고 보기에는 이른 것 같다.
◆벤처업계의 구조조정
사회자=지난해 코스닥시장에서는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최대주주나 회사 대표가 바뀐 경우가 185건이나 된다. 대다수 기업들은 정상적인 절차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일부 기업은 기업을 코스닥에 등록한 후 손을 떼는 ’머니게임’을 벌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 때문에 벤처기업인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부정적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흥호=최근 IT산업의 버블이 해소되는 과정에서 일부 불량 벤처기업인들의 머니게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하지만 언론들이 일부 벤처기업의 사례를 모든 벤처업계의 문제점인 양 확대 재생산해 모든 국민들이 벤처기업인을 평가절하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은 잘못이다. ‘돈 장사’를 하는 벤처기업인에게는 철퇴를 가하되 열심히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인에게는 격려를 보내는 태도가 아쉽기 그지없다.
허진호=언론매체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CEO(최고 경영자)의 자질이나 회사의 가치가 아니라 CEO의 자산 가치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인이 외부로부터 100억원의 자금을 투자받으면 마치 CEO가 100억원을 번 것처럼 보도하는 행태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보도가 벤처기업에 대한 국민의 시각을 머니게임으로 오도하는 잘못을 초래하고 있다.
안철수=언론에서 ’코스닥 등록=성공’이라는 등식을 부각시키는 것도 개선돼야 할 부분이다. 코스닥 등록은 회사가 공모한 자금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마케팅 능력을 배양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출발점일 뿐이다. 언론은 기업이 코스닥에 등록한 후 어떻게 변하고 성장하는지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보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코스닥 등록으로 최종 목표가 달성된 것처럼 생각하는 일부 기업인들의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언론의 자세 변화는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올해 경기 전망
사회자=이 자리에 모인 CEO들은 모두 인터넷 관련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 업체를 포함한 IT산업의 올해 경기 전망에 대해 얘기해달라.
박흥호=인터넷 관련산업은 일단 급격한 경기침체의 늪에서는 벗어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빠른 회복세를 기대하기는 아직 이르다. 점진적 회복이 예상된다. 인터넷 관련산업이 본격적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해외 시장이 활성화돼야 하는데 미국·일본 등 선진국들의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있어 소프트웨어 패키지의 대량 판매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안철수=지난주 실리콘밸리를 방문했을 때 현지 전문가들은 미국 경기가 바닥을 통과중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하지만 통신장비 등 일부 IT종목은 올해를 거쳐 내년에도 재고조정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IT산업이 회복되더라도 과거 IT산업의 활황기 때처럼 폭발적인 호황을 누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이해진=인터넷산업은 그동안 무료로 사용해왔던 인터넷공간이 점차 유료로 전환됨에 따라 기업의 수익성이 크게 향상되고 있다. 특히 인터넷 광고가 대기업 중심에서 중소기업으로 확대됨에 따라 경기민감도가 점차 낮아지고 있다. 또한 게임·복권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관련 콘텐츠의 강화로 이용자들이 계속해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들어 긍정적인 점은 신용불량자가 많은 10~20대보다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하고 있는 30~40대 사용자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최근 인터넷 서비스 유료화의 안정적인 수입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어 기대가 크다.
◆인수합병이 부진한 이유
사회자=IT업계가 수익성 제고를 위해서는 우수한 기술력과 영업력을 갖고 있는 관련 업체를 적극적으로 인수합병(M&A)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실제로 M&A가 성사된 경우는 드문데, 그 이유가 뭔가.
이해진=인터넷기업을 포함한 IT기업의 M&A대상은 기업이 아니라 사람이 주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인적 결합을 이룬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이 때문에 M&A가 쉽게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 벤처기업 CEO들이 과거에 투자를 유치할 때 기업가치를 높게 평가받았던 기억이 남아 있어 기업가치 산정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들이 M&A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안철수=기업 관리의 3대 요소이자 M&A의 핵심사항은 ▲서로에 대한 신뢰 ▲‘말’을 통한 의사소통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한 의사소통이다. M&A를 하려면 피인수 기업의 직원들에게 인수기업의 CEO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M&A를 이용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주고, 이를 말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짧은 기간에 이를 소화해 내기가 쉽지 않다.
◆실패한 벤처기업의 퇴출시스템 갖추어야
사회자=벤처업계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점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안철수〓우선 업계가 정비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보안업계를 예로 들면, 전세계 보안업체수가 450개 정도인데 그 가운데 국내 업체가 200개나 된다. 어떤 아이템이 된다 싶으면 너도나도 뛰어들어, 기술자 1명이 회사 인원의 전부인 경우도 수두룩하다. 이런 기업들이 내세울 게 뭐가 있겠는가. 가격 후려치기가 전부다. 이런 업체들이 난립하는 것은 국가경쟁력 제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런 업체들이 퇴출되지 않고 있으니 문제다.
허진호=정말 공감한다. 기업의 퇴출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벤처의 생명력은 창의적인 발상이다. 창의력이 부족하거나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은 도태되고, 이를 대신해 새로운 벤처기업이 생겨나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벤처기업이 도저히 망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벤처기업 CEO는 대부분 회사와 관련해 막대한 규모의 지급보증 의무를 지고 있다. 이 때문에 실패한 CEO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대표이사직을 그만둘 수도 없고 회사를 정리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말해 국내 벤처기업의 퇴로는 닫혀있는 셈이다.
사회자〓그것은 좀 의외다. 벤처기업은 융자가 아닌 투자 자금 중심으로 움직여, 담보·지급보증 같은 전통적 굴레에서는 벗어나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실제로는 예전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말인가.
허진호〓그렇다. 내가 전에 대표를 맡았던 벤처기업은 매출이 500억원 정도에 이를 정도로 튼실한데도, 당시 내가 대표이사를 그만둘 때 지급보증선 금액이 200억원을 넘었다. 금융 관행은 예나지금이나 별로 개선된 것 같지가 않다.
◆벤처기업들의 해외 진출
사회자=내수시장이 위축되자 해외 진출을 도모하는 벤처기업이 늘고 있다. 나모인터랙티브와 안철수연구소가 성공적인 해외 진출 사례로 꼽히는데, 해외시장 진출시 어려움은 없었는가. 경험을 얘기해달라.
박흥호=소프트웨어의 경우 국내 업체의 기술력과 제품력이 뛰어나고 인적 자원이 풍부해 해외시장 진출에 큰 어려움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제품을 개발하기 위한 시스템은 여전히 선진국에 비해 낙후돼 있다. 따라서 해외 진출을 서두르기 전에 먼저 자사 제품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지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회자=해외 진출을 위해 지사부터 설립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박흥호=해외지사 설립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많은 기업들이 미국 등지에 지사를 설립하고 현지인을 채용하고 있는데, 이는 교두보 확보 차원 이상의 의미를 갖기는 힘들다. 해외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력부대가 이동해 승부수를 걸 정도가 돼야 한다고 본다.
안철수=해외시장 진출은 유통망 확보, 제품 홍보, 현지시장에서의 제품 테스트 등을 선행한 후 자신감이 생기면 지사를 설립하는 순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현지 진출 가능성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막대한 경비까지 들여가며 지사부터 설립하는 것은 무모한 행위다.
◆정부의 지원책
사회자=벤처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책이 수시로 제시되고 있다. 미흡한 점은 없는가.
박흥호=정부는 벤처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자금지원보다는 벤처기업이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근본적인 시스템, 인프라를 만드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안철수=소프트웨어분야의 경우, 지금 정부 기관이 사용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이용 현황을 조사해 불법 소프트웨어를 정품으로만 교체해도 소프트웨어 산업 발전에는 엄청난 힘이 될 것이다. 재정지원이 능사가 아니고 소프트웨어 유통의 건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허진호=벤처기업의 지속적 성장은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벤처기업의 활동을 저해하는 불필요한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코스닥시장을 활성화하는 등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박흥호〓정부의 ‘생색내기 식’ 행정 마인드가 가장 먼저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자=그래도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 있지 않겠는가.
허진호=현행법상 자회사 임직원에게는 스톡옵션을 주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해외 현지법인이 100% 자회사라고 하더라도 본사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스톡옵션을 부여하지 못해 우수한 인재를 충원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내 기업의 해외진출 얘기가 나오면 정부는 우선 전시관 짓고 투자유치단 이끌고 돌아다니는 것부터 생각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을 가로막는 법률적 제약들을 제거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박흥호=코스닥 등록기업의 경우 스톡옵션 대상자와 주식수를 모두 공시하도록 되어 있는 것도 문제다. 이 규정 때문에 해마다 우리 회사는 사내 분위기가 엉망이 되는 경험을 되풀이하고 있다. 스톡옵션에 대한 내역이 낱낱이 공개되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직원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정부는 스톡옵션 관련 공시를 총수량만 공개하는 쪽으로 개선해 사내에 분란의 소지가 생기는 것을 막아주기를 간곡히 당부한다. 관련 업계에서 수차례 요청했음에도, 웬일인지 정부는 꿈쩍을 하지 않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안철수=정부가 선진국 벤처기업들의 성공적인 마케팅 사례를 발굴해 소개해주면 좋겠다. 개별 기업이 해외 관련 업체들의 정보를 모두 수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부가 재외 공관을 활용해 각국에 있는 성공 벤처들의 기술력과 마케팅 정보 등을 수집해 체계적으로 정리해준다면 국내 벤처기업들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이 임기응변식으로 이뤄져서는 곤란하다. 국가산업 발전에 기여한다는 측면에서 장기적 안목을 갖고 벤처지원정책도 입안되고 시행되기를 기대한다.
◆벤처 투자의 문제점
사회자=지난해에는 벤처캐피털 업체들이 투자 규모를 대폭 줄였고, 이 때문에 신생 벤처기업들은 자금조달에 상당한 애로를 경험했다. 벤처캐피털을 포함한 투자자들에게 바램이 있다면...
허진호=지난해 벤처캐피털 업체들의 투자규모가 전년 동기보다는 감소했지만, 지난 97, 98년에 비하면 분명히 대규모 투자가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 단기적으로는 등락이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투자 규모가 확대되는 추세에 있다.
지금은 투자규모보다 투자가 편중된다는 점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벤처캐피털이 신생 벤처기업을 외면하고 어느 정도 검증받은 기존 벤처기업에만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수익성이 검증된 신생 벤처기업에 대한 벤처캐피털의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박흥호=벤처캐피털의 절대적인 투자규모는 적은 편이 아니다. 다만 국내 벤처캐피털의 역사가 짧아 벤처캐피털이 자금만 투자할 뿐 의사결정, 업무협조체제, 인력관리 등 벤처기업의 토털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지원에는 소홀한 것이 문제다. 이 때문에 직원이 100명 이상인 벤처기업도 관리시스템 측면에서는 여전히 ‘굴뚝기업’의 방만한 경영을 답습하고 있다. 벤처캐피털은 신생 벤처기업에 경영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는 지원시스템을 갖춰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회자=최근 벤처캐피털 업계는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 투자로 후끈 달아오른 상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또다른 버블이 우려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허진호=엔터테인먼트분야는 투자 리스크가 높은 반면 투자회수에 따른 이익은 적다. 따라서 엔터테인먼트 기업에 고배수로 투자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만 투자 회수기간이 짧아 투자 기업수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을 뿐이다.
안철수=국내 엔터테인먼트 시장은 한정되어 있는 반면 엔터테인먼트 펀드수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펀드는 조만간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설 것으로 보인다. 그 후유증이 걱정된다.
박흥호=벤처캐피털의 엔터테인먼트 투자는 한마디로 ’머니게임’이다. 엔터테인먼트 투자는 1~2년 사이에 자금 회수가 가능한 단기적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벤처캐피털의 순수한 투자로 인정할 수가 없다.
허진호=미국의 벤처캐피털은 5년 동안 자금을 지속적으로 투자한 후 차후 5년에 걸쳐 자금을 회수하는 장기투자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벤처캐피털은 벤처기업의 장기 육성보다는 단기적인 자금 운용과 회수에 주력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해진=벤처캐피털이 독자적으로 신생기업의 잠재력을 평가할 수 없다면, 국내 우수 IT기업들과 연계해 투자판단을 세우고 공동펀드를 운영하는 방안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벤처업계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사회자=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달라.
박흥호=우리 회사는 설립된 지 만 5년이 됐고 코스닥에 등록한 지는 1년6개월이 됐다. 그 동안 회사의 규모가 커져서 일부 비능률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조직 혁신과 제품 다양화를 통해 고객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사내 정풍(整風)운동을 펼칠 생각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선인들의 말을 잊지 않고 쇄신에 주력할 계획이다. 모든 벤처기업인들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면 신경제의 엔진이 노화되는 현상을 막고 국가경제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안철수=벤처기업은 지난 2년동안 세인들로부터 각광을 받기도 했으나 지나친 냉대를 받기도 했다. 이는 70년대 ‘압축 성장’과정에서 경험했던 심각한 후유증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우리사회에는 전통산업과 IT산업이 별개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팽배해 있는데, 이런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큰 틀에서 보자면 IT산업은 전통산업의 종속변수이자 경제의 한 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IT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대기업, 금융 등 기존의 경제주체들이 탄탄한 성장세를 유지해야 한다. IT, 벤처만 따로 떼어놓고 보는 논리에서 하루 빨리 탈피해 신·구(新舊) 산업이 조화를 이루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해진=우리나라는 누가뭐래도 인터넷 선진국이다.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하는 인구수도 세계적이고, 이들이 인터넷 환경에 적응하는 속도도 놀라울 정도다. 정부가 무선인프라 기반을 적극적으로 구축한다면 인터넷기업들도 혁신적인 수익모델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정부는 무선망 개방과 사용료 인하 등 무선인프라 구축을 선도함으로써 무선인터넷 활성화에 앞장서 주기를 기대한다. 인터넷기업들도 무선망을 활용한 다양한 콘텐츠 개발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허진호=벤처기업이 걸어가는 길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이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시행착오가 생기기 마련이다. 세간에서는 이를 놓고 왈가왈부하며 ’거품론’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가 ‘거품론’ 없이 열린 적이 있었던가. 모든 벤처기업인들은 새로운 희망을 갖고 열심히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벤처기업이 국가 경제의 희망이자 성장의 엔진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정리: 남상훈기자>
그렇게 2년을 보낸 지금, IT업계에는 회생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통신서비스·단말기·TFT―LCD·게임·홈쇼핑 업체들은 이미 회복세에 접어들었고, ‘닷컴 거품론’의 직격탄을 맞았던 인터넷 업계도 선발업체 중심으로 뚜렷한 수익성 개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통신장비·네트워크 장비업체들이 상대적으로 뒤늦은 회복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이들도 올해 말쯤에는 회복세로 돌아설 것이란 전망이 우세한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국내 벤처업계의 대표주자들을 초청해 지난 2년간 IT업계를 조명해보고, 최근 현황과 향후 전망을 심층 점검했다.
〈편집자〉
장소: 디지털타임스 본사 7층 회의실
참석자: 박흥호 나모인터랙티브 사장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사장
이해진 네이버 사장
허진호 아이월드 사장
사회자: 박재권 디지털타임스 경제과학부 차장대우
사회자〓먼저 지난 2년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한번 짚어보기로 하자. 2000년 벽두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닷컴 거품론’이 IT산업 전반에 대한 ‘거품론’으로 인식되면서 IT업계가 깊은 수렁에 빠졌다. 그 과정에서 IT업체들이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벤처기업들은 생존의 위협까지 느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었나.
허진호〓 IT산업의 거품 형성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2000년부터 본격화된 IT산업의 거품 제거는 IT기업에 대한 사고를 정상으로 돌려놓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고 본다. IT산업 이상 과열로 과대평가됐던 기업들의 가치가 제자리를 찾음에 따라 매출, 영업이익 등 수익성이 중시되는 풍토가 조성됐다. IT기업도 성장성 못지 않게 견실한 수익구조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됐다.
벤처기업의 자금 조달 환경이 마련된 점도 긍정적이다. 코스닥시장은 벤처기업들이 마케팅 능력과 기술력을 향상시키는데 필요한 자금조달 창구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그 덕분에 벤처가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가 마련되었다고 본다.
안철수〓단기적으로 보면 지난 2년은 최악의 시기였고, 지금도 고생이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는 계속해서 증가해왔고, 기업을 하기 위한 환경도 확실히 좋아졌다. 98년 이전에는 ‘벤처 투자’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 아닌가.
사회자〓사실 IT산업의 거품은 세간의 과도한 기대감에서 비롯됐고,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이 인터넷 산업이었다. 구체적으로 포털·보안솔루션·소프트웨어 업종은 현재 어떤 상황인가.
이해진〓닷컴 기업을 운영하는 사장들은 지난 2년간 지나친 낙관론을 경계하고 내실을 다지려는 노력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닷컴기업 대망론’을 외치며 앞서나갔던 사람들이 닷컴기업들의 성장성에 회의를 품고 ‘닷컴 무망론(無望論)’으로 돌아섰음에도, 많은 닷컴기업들은 이 같은 시대 조류에 편승하지 않고 꾸준히 ‘비즈니스 모델’을 마련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여왔다. 그 성과가 최근 들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터넷 보급의 확산과 이용자 확대에 힘입어 일부 닷컴 업체들이 흑자를 시현하는 등 수익성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
안철수=과잉 투자와 과잉 생산으로 인한 IT산업의 거품 해소과정은 3가지 측면에서 상당히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먼저 선진국에서는 상식으로 통하지만 지난 2년간 우리나라 벤처기업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던 수익모델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된 점이다. 벤처기업이 정도(正道) 경영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또 경기침체를 경험하면서 위기관리 시스템이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는 경영의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큰 수확이다. 솔직히 그동안 벤처기업은 고성장에 만취돼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자생력 배양에는 소홀히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IT혹한기의 경험을 토대로 많은 벤처기업들이 위기관리시스템 마련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벤처기업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자리잡은 것도 중장기적으로 벤처기업의 성장에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벤처기업이 대규모 자본을 유치하거나 우수한 인력을 충원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벤처기업이 국내산업의 한 축으로 이해되면서 코스닥 등록을 통한 대규모 자금확보가 가능해졌고 일류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이 벤처기업으로 몰려들어 인력확보 환경도 크게 개선됐다.
박흥호=안 사장의 말처럼 기업의 수익모델은 기업의 가치를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다. IT기업의 거품은 수익모델보다는 성장성을 지나치게 부각시킨 결과이다. 결국 개별 기업들조차도 자기 회사의 적정한 기업가치를 산정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고 투자자들 역시 회사의 수익성을 검증하기보다는 성장성만을 좇아 무분별하게 투자했던 점이 IT거품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
하지만 최근 수익모델에 따라 기업의 옥석이 가려지면서 IT기업의 가치산정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다만 투자자들이 개별기업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단기 투자에만 열중하는 것은 여전히 아쉬운 점으로 꼽을 수 있다.
사회자=현재 IT업계의 버블은 완전히 걷혔다고 보는가.
허진호=미국 나스닥 기업들의 평균 주가수익비율(PER)은 현재 10~15배로 지난 10년 평균 PER보다 여전히 10% 정도 높은 수준으로 알고 있다. 아직도 거품이 완전히 해소된 상태는 아니라는 얘기다. 코스닥 기업들의 평균 PER도 미국 나스닥 기업과 비슷해 코스닥기업들의 기업가치가 정상을 찾아가고 있지만 완전히 제거됐다고 보기에는 이른 것 같다.
◆벤처업계의 구조조정
사회자=지난해 코스닥시장에서는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최대주주나 회사 대표가 바뀐 경우가 185건이나 된다. 대다수 기업들은 정상적인 절차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일부 기업은 기업을 코스닥에 등록한 후 손을 떼는 ’머니게임’을 벌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 때문에 벤처기업인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부정적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흥호=최근 IT산업의 버블이 해소되는 과정에서 일부 불량 벤처기업인들의 머니게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하지만 언론들이 일부 벤처기업의 사례를 모든 벤처업계의 문제점인 양 확대 재생산해 모든 국민들이 벤처기업인을 평가절하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은 잘못이다. ‘돈 장사’를 하는 벤처기업인에게는 철퇴를 가하되 열심히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인에게는 격려를 보내는 태도가 아쉽기 그지없다.
허진호=언론매체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CEO(최고 경영자)의 자질이나 회사의 가치가 아니라 CEO의 자산 가치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인이 외부로부터 100억원의 자금을 투자받으면 마치 CEO가 100억원을 번 것처럼 보도하는 행태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보도가 벤처기업에 대한 국민의 시각을 머니게임으로 오도하는 잘못을 초래하고 있다.
안철수=언론에서 ’코스닥 등록=성공’이라는 등식을 부각시키는 것도 개선돼야 할 부분이다. 코스닥 등록은 회사가 공모한 자금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마케팅 능력을 배양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출발점일 뿐이다. 언론은 기업이 코스닥에 등록한 후 어떻게 변하고 성장하는지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보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코스닥 등록으로 최종 목표가 달성된 것처럼 생각하는 일부 기업인들의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언론의 자세 변화는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올해 경기 전망
사회자=이 자리에 모인 CEO들은 모두 인터넷 관련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 업체를 포함한 IT산업의 올해 경기 전망에 대해 얘기해달라.
박흥호=인터넷 관련산업은 일단 급격한 경기침체의 늪에서는 벗어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빠른 회복세를 기대하기는 아직 이르다. 점진적 회복이 예상된다. 인터넷 관련산업이 본격적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해외 시장이 활성화돼야 하는데 미국·일본 등 선진국들의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있어 소프트웨어 패키지의 대량 판매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안철수=지난주 실리콘밸리를 방문했을 때 현지 전문가들은 미국 경기가 바닥을 통과중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하지만 통신장비 등 일부 IT종목은 올해를 거쳐 내년에도 재고조정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IT산업이 회복되더라도 과거 IT산업의 활황기 때처럼 폭발적인 호황을 누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이해진=인터넷산업은 그동안 무료로 사용해왔던 인터넷공간이 점차 유료로 전환됨에 따라 기업의 수익성이 크게 향상되고 있다. 특히 인터넷 광고가 대기업 중심에서 중소기업으로 확대됨에 따라 경기민감도가 점차 낮아지고 있다. 또한 게임·복권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관련 콘텐츠의 강화로 이용자들이 계속해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들어 긍정적인 점은 신용불량자가 많은 10~20대보다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하고 있는 30~40대 사용자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최근 인터넷 서비스 유료화의 안정적인 수입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어 기대가 크다.
◆인수합병이 부진한 이유
사회자=IT업계가 수익성 제고를 위해서는 우수한 기술력과 영업력을 갖고 있는 관련 업체를 적극적으로 인수합병(M&A)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실제로 M&A가 성사된 경우는 드문데, 그 이유가 뭔가.
이해진=인터넷기업을 포함한 IT기업의 M&A대상은 기업이 아니라 사람이 주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인적 결합을 이룬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이 때문에 M&A가 쉽게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 벤처기업 CEO들이 과거에 투자를 유치할 때 기업가치를 높게 평가받았던 기억이 남아 있어 기업가치 산정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들이 M&A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안철수=기업 관리의 3대 요소이자 M&A의 핵심사항은 ▲서로에 대한 신뢰 ▲‘말’을 통한 의사소통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한 의사소통이다. M&A를 하려면 피인수 기업의 직원들에게 인수기업의 CEO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M&A를 이용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주고, 이를 말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짧은 기간에 이를 소화해 내기가 쉽지 않다.
◆실패한 벤처기업의 퇴출시스템 갖추어야
사회자=벤처업계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점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안철수〓우선 업계가 정비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보안업계를 예로 들면, 전세계 보안업체수가 450개 정도인데 그 가운데 국내 업체가 200개나 된다. 어떤 아이템이 된다 싶으면 너도나도 뛰어들어, 기술자 1명이 회사 인원의 전부인 경우도 수두룩하다. 이런 기업들이 내세울 게 뭐가 있겠는가. 가격 후려치기가 전부다. 이런 업체들이 난립하는 것은 국가경쟁력 제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런 업체들이 퇴출되지 않고 있으니 문제다.
허진호=정말 공감한다. 기업의 퇴출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벤처의 생명력은 창의적인 발상이다. 창의력이 부족하거나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은 도태되고, 이를 대신해 새로운 벤처기업이 생겨나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벤처기업이 도저히 망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벤처기업 CEO는 대부분 회사와 관련해 막대한 규모의 지급보증 의무를 지고 있다. 이 때문에 실패한 CEO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대표이사직을 그만둘 수도 없고 회사를 정리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말해 국내 벤처기업의 퇴로는 닫혀있는 셈이다.
사회자〓그것은 좀 의외다. 벤처기업은 융자가 아닌 투자 자금 중심으로 움직여, 담보·지급보증 같은 전통적 굴레에서는 벗어나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실제로는 예전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말인가.
허진호〓그렇다. 내가 전에 대표를 맡았던 벤처기업은 매출이 500억원 정도에 이를 정도로 튼실한데도, 당시 내가 대표이사를 그만둘 때 지급보증선 금액이 200억원을 넘었다. 금융 관행은 예나지금이나 별로 개선된 것 같지가 않다.
◆벤처기업들의 해외 진출
사회자=내수시장이 위축되자 해외 진출을 도모하는 벤처기업이 늘고 있다. 나모인터랙티브와 안철수연구소가 성공적인 해외 진출 사례로 꼽히는데, 해외시장 진출시 어려움은 없었는가. 경험을 얘기해달라.
박흥호=소프트웨어의 경우 국내 업체의 기술력과 제품력이 뛰어나고 인적 자원이 풍부해 해외시장 진출에 큰 어려움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제품을 개발하기 위한 시스템은 여전히 선진국에 비해 낙후돼 있다. 따라서 해외 진출을 서두르기 전에 먼저 자사 제품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지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회자=해외 진출을 위해 지사부터 설립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박흥호=해외지사 설립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많은 기업들이 미국 등지에 지사를 설립하고 현지인을 채용하고 있는데, 이는 교두보 확보 차원 이상의 의미를 갖기는 힘들다. 해외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력부대가 이동해 승부수를 걸 정도가 돼야 한다고 본다.
안철수=해외시장 진출은 유통망 확보, 제품 홍보, 현지시장에서의 제품 테스트 등을 선행한 후 자신감이 생기면 지사를 설립하는 순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현지 진출 가능성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막대한 경비까지 들여가며 지사부터 설립하는 것은 무모한 행위다.
◆정부의 지원책
사회자=벤처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책이 수시로 제시되고 있다. 미흡한 점은 없는가.
박흥호=정부는 벤처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자금지원보다는 벤처기업이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근본적인 시스템, 인프라를 만드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안철수=소프트웨어분야의 경우, 지금 정부 기관이 사용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이용 현황을 조사해 불법 소프트웨어를 정품으로만 교체해도 소프트웨어 산업 발전에는 엄청난 힘이 될 것이다. 재정지원이 능사가 아니고 소프트웨어 유통의 건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허진호=벤처기업의 지속적 성장은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벤처기업의 활동을 저해하는 불필요한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코스닥시장을 활성화하는 등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박흥호〓정부의 ‘생색내기 식’ 행정 마인드가 가장 먼저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자=그래도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 있지 않겠는가.
허진호=현행법상 자회사 임직원에게는 스톡옵션을 주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해외 현지법인이 100% 자회사라고 하더라도 본사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스톡옵션을 부여하지 못해 우수한 인재를 충원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내 기업의 해외진출 얘기가 나오면 정부는 우선 전시관 짓고 투자유치단 이끌고 돌아다니는 것부터 생각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을 가로막는 법률적 제약들을 제거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박흥호=코스닥 등록기업의 경우 스톡옵션 대상자와 주식수를 모두 공시하도록 되어 있는 것도 문제다. 이 규정 때문에 해마다 우리 회사는 사내 분위기가 엉망이 되는 경험을 되풀이하고 있다. 스톡옵션에 대한 내역이 낱낱이 공개되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직원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정부는 스톡옵션 관련 공시를 총수량만 공개하는 쪽으로 개선해 사내에 분란의 소지가 생기는 것을 막아주기를 간곡히 당부한다. 관련 업계에서 수차례 요청했음에도, 웬일인지 정부는 꿈쩍을 하지 않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안철수=정부가 선진국 벤처기업들의 성공적인 마케팅 사례를 발굴해 소개해주면 좋겠다. 개별 기업이 해외 관련 업체들의 정보를 모두 수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부가 재외 공관을 활용해 각국에 있는 성공 벤처들의 기술력과 마케팅 정보 등을 수집해 체계적으로 정리해준다면 국내 벤처기업들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이 임기응변식으로 이뤄져서는 곤란하다. 국가산업 발전에 기여한다는 측면에서 장기적 안목을 갖고 벤처지원정책도 입안되고 시행되기를 기대한다.
◆벤처 투자의 문제점
사회자=지난해에는 벤처캐피털 업체들이 투자 규모를 대폭 줄였고, 이 때문에 신생 벤처기업들은 자금조달에 상당한 애로를 경험했다. 벤처캐피털을 포함한 투자자들에게 바램이 있다면...
허진호=지난해 벤처캐피털 업체들의 투자규모가 전년 동기보다는 감소했지만, 지난 97, 98년에 비하면 분명히 대규모 투자가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 단기적으로는 등락이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투자 규모가 확대되는 추세에 있다.
지금은 투자규모보다 투자가 편중된다는 점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벤처캐피털이 신생 벤처기업을 외면하고 어느 정도 검증받은 기존 벤처기업에만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수익성이 검증된 신생 벤처기업에 대한 벤처캐피털의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박흥호=벤처캐피털의 절대적인 투자규모는 적은 편이 아니다. 다만 국내 벤처캐피털의 역사가 짧아 벤처캐피털이 자금만 투자할 뿐 의사결정, 업무협조체제, 인력관리 등 벤처기업의 토털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지원에는 소홀한 것이 문제다. 이 때문에 직원이 100명 이상인 벤처기업도 관리시스템 측면에서는 여전히 ‘굴뚝기업’의 방만한 경영을 답습하고 있다. 벤처캐피털은 신생 벤처기업에 경영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는 지원시스템을 갖춰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회자=최근 벤처캐피털 업계는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 투자로 후끈 달아오른 상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또다른 버블이 우려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허진호=엔터테인먼트분야는 투자 리스크가 높은 반면 투자회수에 따른 이익은 적다. 따라서 엔터테인먼트 기업에 고배수로 투자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만 투자 회수기간이 짧아 투자 기업수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을 뿐이다.
안철수=국내 엔터테인먼트 시장은 한정되어 있는 반면 엔터테인먼트 펀드수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펀드는 조만간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설 것으로 보인다. 그 후유증이 걱정된다.
박흥호=벤처캐피털의 엔터테인먼트 투자는 한마디로 ’머니게임’이다. 엔터테인먼트 투자는 1~2년 사이에 자금 회수가 가능한 단기적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벤처캐피털의 순수한 투자로 인정할 수가 없다.
허진호=미국의 벤처캐피털은 5년 동안 자금을 지속적으로 투자한 후 차후 5년에 걸쳐 자금을 회수하는 장기투자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벤처캐피털은 벤처기업의 장기 육성보다는 단기적인 자금 운용과 회수에 주력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해진=벤처캐피털이 독자적으로 신생기업의 잠재력을 평가할 수 없다면, 국내 우수 IT기업들과 연계해 투자판단을 세우고 공동펀드를 운영하는 방안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벤처업계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사회자=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달라.
박흥호=우리 회사는 설립된 지 만 5년이 됐고 코스닥에 등록한 지는 1년6개월이 됐다. 그 동안 회사의 규모가 커져서 일부 비능률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조직 혁신과 제품 다양화를 통해 고객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사내 정풍(整風)운동을 펼칠 생각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선인들의 말을 잊지 않고 쇄신에 주력할 계획이다. 모든 벤처기업인들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면 신경제의 엔진이 노화되는 현상을 막고 국가경제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안철수=벤처기업은 지난 2년동안 세인들로부터 각광을 받기도 했으나 지나친 냉대를 받기도 했다. 이는 70년대 ‘압축 성장’과정에서 경험했던 심각한 후유증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우리사회에는 전통산업과 IT산업이 별개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팽배해 있는데, 이런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큰 틀에서 보자면 IT산업은 전통산업의 종속변수이자 경제의 한 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IT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대기업, 금융 등 기존의 경제주체들이 탄탄한 성장세를 유지해야 한다. IT, 벤처만 따로 떼어놓고 보는 논리에서 하루 빨리 탈피해 신·구(新舊) 산업이 조화를 이루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해진=우리나라는 누가뭐래도 인터넷 선진국이다.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하는 인구수도 세계적이고, 이들이 인터넷 환경에 적응하는 속도도 놀라울 정도다. 정부가 무선인프라 기반을 적극적으로 구축한다면 인터넷기업들도 혁신적인 수익모델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정부는 무선망 개방과 사용료 인하 등 무선인프라 구축을 선도함으로써 무선인터넷 활성화에 앞장서 주기를 기대한다. 인터넷기업들도 무선망을 활용한 다양한 콘텐츠 개발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허진호=벤처기업이 걸어가는 길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이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시행착오가 생기기 마련이다. 세간에서는 이를 놓고 왈가왈부하며 ’거품론’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가 ‘거품론’ 없이 열린 적이 있었던가. 모든 벤처기업인들은 새로운 희망을 갖고 열심히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벤처기업이 국가 경제의 희망이자 성장의 엔진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정리: 남상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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