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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애 칼럼] 지금, `최형섭 정신`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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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애 ICT과학부장
[안경애 칼럼] 지금, `최형섭 정신`이 절실하다
지난달 29일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 앞에 국화꽃 다발 몇개가 놓여 있었다. 흰 리본에는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대부'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의 20주기 추모식은 이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내부 행사로 조용하게 치러졌다. 오상록 원장을 비롯한 KIST 전·현직 원장과 과학기술계 인사 100명 정도가 모였다. 오상록 원장의 추모사에는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 "과학기술이 기술 우위를 넘어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희에게, 박사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까 궁금합니다."

최 전 장관은 먹고 사는 문제가 급했던 시절, 한국에 과학기술의 뿌리를 심었다. 그를 믿고 힘을 실어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합작한 결과다. "머리카락 팔아 번 돈이 뭐가 자랑스럽습니까? 일본은 10억달러 어치의 전자제품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1965년 4월, 과학자들을 초청해 청와대에서 연회를 하던 박정희 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원자력연구소장이던 최 전 장관은 "작년에 경공업 수출로 2000만달러나 벌었다"며 흐뭇해 하는 박 대통령에게 돌직구를 던졌다. 당시 우리나라는 철광석, 무연탄, 돼지털 정도를 수출하는 나라였고, 수출액 3위 품목이 가발이었다.

다음 달 베트남 파병에 대한 감사 표시로 미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간 박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이후 발표된 공동 성명문에 종합연구기관을 설립한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한국 최초의 종합연구소이자 과학기술 역사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KIST 설립의 시작이었다.

박 대통령은 최 전 장관에게 KIST 설립을 맡겼다. 1966년 2월 설립된 KIST를 중심으로 우리나라는 기술 기반 산업화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1971년까지 KIST 원장을 지낸 최 전 장관은 1971년부터 1978년까지 과기처 장관을 역임했다. 그가 세운 역대 최장수 장관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소득 수준부터 경제 규모, 국가 위상까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호는 거친 풍랑을 헤쳐 나가고 있다.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됐지만 갈수록 고난도 문제가 주어진다. AI부터 반도체까지 산업현장은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전쟁 상황이다. 과거에는 연구자들이 '불 꺼지지 않는 연구소'에서 만들어낸 기술 하나로 산업의 지형도를 바꿀 수 있었지만 갈수록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재와 자본, 기술에서 미·중 등 주요 국과의 체급 차이는 극복이 요원하고, 소프트웨어는 인도, 반도체는 대만에 밀린다. 특히 '소프트 파워' 부족이 반도체부터 AI까지 곳곳에서 뼈아프게 드러난다. 인재와 협업문화, 소프트웨어를 못 키운 것은 그동안 앞서 가는 이들을 쫓아가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정치는 어지럽고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던 관료들에게선 과거의 패기와 절실함을 읽기 힘들다.

최 전 장관이 살아있다면 우리에게 어떤 얘기를 해줄까. 그를 움직인 것은 폐허 속에서도 과학기술을 통해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리더와 동료들이 뜻을 같이 했다. 그는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 전 세계를 돌며 재외 한인 과학자들에게 조국을 위해 일해줄 것을 호소했다. 진심이 통한 18명의 과학자가 연봉이 깎여가며 고국으로 돌아왔다. 대통령은 그런 과학자들을 전폭적으로 밀어줬다.

순수와 경쟁을 잃어버린 연구자들을 가차없이 나무랐던 최 전 장관의 묘비에는 그가 평소 강조한 '연구자의 덕목'이 새겨져 있다. "학문에 거짓이 없어야 하고 부귀영화에 집착해선 안 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이는 비단 연구자만 갖춰야 할 덕목이 아니다. 2024년, 대한민국 앞에 놓인 난관을 극복하는 길은 절실함과 순수함, 함께 행동하는 집단의 힘밖에 없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들이 다시 무장해야 한다. 다행히 그때는 없던 힘 있는 기업들이 지금은 있다. 정치는 과학, 과학은 정치를 손가락질할 게 아니라 60년 전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최형섭 정신'이 절실하다. ICT과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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