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찰스`가 싫은 찰스 3세, "피로 얼룩지고 바람기 배인 이름"

찰스·필립·아서·조지 가운데 하필이면 '찰스'로 낙점
의회와 대립한 전제군주 찰스1세, 크롬웰에 의해 참수
바람둥이 찰스2세 위해 콘돔 경이 만든 게 후에 '콘돔'
9세에 왕세자 책봉, 엄마의 부족분을 외할머니가 채워
64년 '후계수업', 가장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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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찰스`가 싫은 찰스 3세, "피로 얼룩지고 바람기 배인 이름"
찰스3세 영국 국왕



올해로 74세인 '찰스 필립 아서 조지'가 왕세자가 된 지 64년 만에 왕위에 올랐다. 찰스 3세다. 이로써 영국 왕조에서 '찰스'라는 호칭을 가진 왕이 3명이 됐다. 그런데 새 왕은 '찰스' 호칭이 싫었다고 한다. 앞의 두 왕 가운데 찰스 1세는 참수됐고 찰스 2세는 바람둥이였기 때문이다. 호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의무와 책임을 깊이 인식하는 '좋은 왕'이 되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나는 '조지'로 불리고 싶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서거하면서 승계 서열 1위인 큰 아들 찰스 왕세자가 군주 자리에 올랐다. 영국 역사상 가장 늦은 나이에 왕이 됐다. 여왕 서거 직후 왕위계승 평의회가 '찰스 3세'라는 이름으로 왕위 계승을 선언하면서 새 왕은 '찰스 3세'가 됐다.

새 왕은 '찰스 필립 아서 조지' 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찰스, 필립, 아서, 조지라는 네 가지 중 하나를 국왕 호칭으로 택할 수 있었다. 그가 선호했던 국왕 호칭은 '조지'였다. 외할아버지 조지 6세에 대한 경의를 표할 수 있고, 매우 사랑했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도 되기에 '조지'로 불리고 싶었다고 한다.

반면 '찰스'라는 호칭은 무척 싫어했다. 이 호칭을 가진 역대 찰스 1세와 찰스 2세 모두 문제가 많았던 탓이었다. 이들이 통치했던 시기는 피로 얼룩졌고 외회와 갈등이 심했었다. 그래서 '조지 7세'로 불려지길 원했지만 결국 '찰스 3세'가 됐다.

◇'목 잘린 군주' 찰스 1세

찰스 1세는 1625년에 왕좌에 올랐다. 그는 신성한 왕권 이론의 추종자였다. 왕은 법과 의회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1629년 3월 찰스 1세는 힘으로 의회 문을 닫아버렸다.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 사치와 전쟁으로 국고가 탕진되자 의회에 증세를 요구했는데 마음대로 안 되자 의회를 폐쇄해 버린 것이다.

이후 11년 동안 의회가 열리지 않으면서 찰스 1세의 전제정치가 지속됐다. 이는 청교도 혁명으로 이어졌다.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병(鐵騎兵)은 연전연승했다. 5년간의 내전은 1647년 크롬웰의 승리로 끝났다. 찰스 1세는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도망갔다. 얼마 후 찰스 1세는 왕정군과 스코틀랜드 군을 이끌고 반격을 가했다. 크롬웰은 랭커셔 전투에서 승리해 찰스 1세를 붙잡았다.

찰스 1세는 135명으로 구성된 재판부로 넘겨졌다. 그는 폭정, 반역, 살인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649년 1월 사형집행인이 휘두른 도끼에 목이 날아갔다. 찰스 1세는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처형된 왕으로 기록됐다. 왕이 죽자 크롬웰이 권력을 장악했다.

1658년 9월 '호국경' 크롬웰이 독감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 자리를 이었으나, 반(反)크롬웰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리처드를 축출하고 망명 중이던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스튜어트를 불러들였다. 왕정이 복고된 것이다.

◇'천하의 바람둥이' 찰스 2세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스튜어트는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660년 런던으로 돌아와 찰스 2세가 됐다. 찰스 2세는 바람둥이였다. "쾌락을 좀 추구했다고 해서 신이 그 사람을 파멸시키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공식 애인만 50명을 두었다. 찰스 2세는 캐더린 왕비와 비교적 사이가 좋았지만 왕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가져 12명 이상의 사생아를 낳았다. 이 바람둥이 왕을 위해 궁정 주치의 콘돔 경(卿)이 어린 양의 맹장으로 만든 것이 '콘돔'이다. 영국 국민들은 콘돔을 '프랑스 편지'라고 불렀다. 찰스 2세가 프랑스에서 온 것을 빗댄 것이었다.

찰스 2세가 즉위 직후 제일 먼저 한 일은 크롬웰에 대한 복수였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혀있던 크롬웰의 시신을 부관참시했다. 머리를 잘라내 창에 꽂아 웨스트민스터 홀의 바깥에 세워 두었다. 크롬웰의 머리는 24년동안 걸려 있었다.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고 경매에 붙여지기도 했다. 400년 뒤인 1960년 크롬웰의 해골은 캠브리지에 있는 시드니 서섹스대학 교회에 다시 묻혔다. 청교도가 세운 이 대학은 한때 크롬웰이 다닌 적이 있었다.

찰스 2세는 선친 찰스 1세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재판부에게도 보복했다. 그때까지 살아있던 재판부 인사들은 대역죄로 교수형이나 종신형을 받았다. 찰스 2세는 의회와의 갈등 속에서 왕권 확대 정책을 썼지만 왕권 약화의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 영국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엄마 사랑을 갈구했던 어린 왕세자

영국의 새로운 왕 찰스 3세는 1948년 런던 버킹엄 궁전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어머니가 여왕이 되면서 그의 운명도 바뀌었다. 9살이던 1958년 '웨일스 왕자'(Prince of Wales)로 책봉됐다. 'Prince of Wales'는 영국 왕위 계승자에 붙는 칭호다. 13세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 지역을 합병했을 때 웨일스 여론을 달래기 위해 만들었다. 에드워드 1세는 임신한 왕비를 데려와 웨일스에서 왕자를 낳게 했고, 이 왕자가 웨일스 출신의 왕위 계승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후 영국에선 차기 왕위 계승자에게 'Prince of Wales'를 붙이는 전통이 생겼다.

왕세자가 된 찰스의 삶은 외로웠다. 어머니는 항상 바빴다. 장기 순방도 많았다. 아버지는 엄격했다. 6개월간 아버지와 어머니를 볼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어머니와 동갑내기인 유모(乳母) 마벨 앤더슨이 큰 힘이 되어주었다. 유모는 항상 그와 가까이 있었다. 찰스가 포옹을 원하면 아낌없이 안아 주었다.

찰스의 또 다른 안식처는 외할머니 엘리자베스 모후(母后)였다. 외할머니는 어린 찰스를 다양한 공연에 데리고 갔다. 덕분에 찰스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사랑을 키울 수 있었다. 또한 외할머니는 찰스가 아플 때마다 정성껏 간호도 해줬다. 2002년 엘리자베스 모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찰스는 매우 상심했다고 한다.

성장한 찰스는 캠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컬리지에 입학해 인류학, 역사학을 전공했다. 원래 왕실 사람들은 대학을 가지 않고 사관학교에 입교하는 게 전통이었다. 그는 이런 전통을 깬 첫 번째 주인공이 됐다. 당연히 그는 왕실 최초로 대학 학위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1970년 대학을 졸업한 후 군에 입대했다. 해군과 공군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1976년 해군 대위로 전역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감이 없었다. 1981년 나이 차이가 13살 나는 다이애나 스펜서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윌리엄과 해리 두 아들을 낳았지만 1992년 별거를 시작해 1996년 이혼했다. 왕위 계승에서 실격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장남 윌리엄 왕자에게 왕세자 자리를 넘겨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74세에 왕위 올라 찰스3세가 되다

1997년 다이애나가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여왕은 다이애나의 사망 소식에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조기도 게양하지 않았고 장례마저도 가족장을 고려했다. 영국 왕실을 향한 여론은 극도로 악화됐다. 찰스는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와 함께 왕실장을 치러야 한다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결국 여왕은 입장을 바꿨다. 여왕과 찰스를 비롯한 모든 왕실 구성원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여왕은 다이애나를 애도하는 성명도 직접 발표했다.

이로 인해 찰스의 이미지는 복구되기 시작했다. 다이애나의 죽음이 찰스에겐 전환점이 된 셈이었다. 다이애나 사후 8년 뒤인 2005년 불륜 상대였던 카밀라와 재혼했다. 이후 풍파는 있었지만 찰스의 이미지는 좋아졌다. 기후변화 대응, 자선활동에 열심이었고 때로는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이제 64년의 '후계 수업'을 마치고 새 왕이 됐다. 흰 머리카락 가득한 새 군주가 엘리자베스2세 만큼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지는 두고 볼 일이다. 부디 그가 선대(先代) 찰스 1세와 2세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독일의 무차별 공습에도 버킹엄 궁전을 떠나지 않고 국민들과 함께 했던 조지 6세 같은 '책임있는 군주'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찰스'라는 호칭이 더 이상 불명예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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