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포기 후 과학자로 측정분석 연구 매진
원장 맡고 60여개 팀으로 개편… 효율 향상
진단키트·전기차·수소차 분야서 값진 성과
양자·첨단바이오 등 미래기술 확보에 사활
원장 맡고 60여개 팀으로 개편… 효율 향상
진단키트·전기차·수소차 분야서 값진 성과
양자·첨단바이오 등 미래기술 확보에 사활
![[이준기의 D사이언스] "과감한 팀제 도입해 연구 혁신… 양자기술도 우리가 선도해야죠"](http://contents.dt.co.kr/images/202203/2022032902100831731002[1].jpg "[이준기의 D사이언스] \"과감한 팀제 도입해 연구 혁신… 양자기술도 우리가 선도해야죠\"")
박현민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원장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고 해야 할까. 연구 현장은 물론이고, 과학기술 정책 분야까지 과학자로선 보기 드문 능력을 가진 것 같다. 이공계 출신이지만 전혀 이공계스럽지(?) 않다. 인문학적 사고와 깊이 있는 분석력,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는 리더십에 추진력까지 고루 갖췄다. 여기에 국가 과학기술 정책을 다뤘던 행정 경험이 더해져 현장과 괴리되지 않는 정책 이슈 발굴과 세심한 실행력도 겸비했다.
이런 것들이 미지의 새로운 물질을 이루는 아주 작은 영역인 원자 구조를 밝히는 지난 30년 가까운 연구 생활을 통해 체화됐기에 표출되는 듯 싶다.
박현민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원장은 이런 스타일의 과학자 출신 기관장이다. 그 역시 스스로 문과적 사고에 가까운 사람이 평가했다. 코로나19 확산 초창기인 2020년 2월 원장에 취임한 그는 국가 측정표준 대표 연구기관의 수장에 올라 뉴 노멀 시대에 걸맞는 세상의 기준을 만드는 데 조직의 역량을 쏟고 있다.
이를 위해선 '연구 수월성' 확보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신념에 연구자들의 반발을 무릎 쓰고, 취임하자마자 팀제 도입을 골자로 한 파격적인 연구조직 개편을 추진했다.
박 원장은 "연구 수월성 지향하기 위해선 먼저 남들이 하지 않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연구조직을 기존 센터에서 팀으로 쪼개 이슈에 빠르게 대응하고, 팀원 또는 팀 간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기존 '연구 판'을 바꾸는 혁신을 시도했다"고 했다.
팀을 출연연, 대학 등 내외부 연구조직과 협업할 수 있도록 개방형 조직으로 운영했고, 안정적인 연구비 확보와 첨단 대형연구장비에 대한 투자, 실질적 성과를 낸 연구자에 대한 보상체계 등 최고 수준의 연구할 수 있는 시스템과 제도 정비도 과감히 추진했다.
그는 "앞으로 대변혁의 시대에 표준연과 같은 국가 연구소가 연구 수월성을 확보한 핵심 기관으로 역할을 하기 위해선 명확한 임무 확립과 연구 자율성·독립성 강화, 우수한 연구인력 양성, 효과적인 R&D 투자 등이 뒷받침돼야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담=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의대 진학 접고 사촌 형 영향 '과학자' 선택=박 원장은 학창 시절,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을 잘 했을 뿐,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은 없었다. 그저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낸 뒤 부모님의 권유로 의대에 입시 원서를 내고, 합격해 의사 길로 들어서는 듯 했다.
하지만, KAIST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재료공학 박사를 받고 한국에 돌아온 사촌 형을 만나면서 진로가 바뀌었다. 그는 "당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에 돌아온 사촌 형이 너무도 멋있고 근사해 보였다"며 "사촌 형과 자연스럽게 많은 얘기를 나누고, 진로에 대한 조언을 받아 대학 입시를 다시 쳐서 공과대학에 입학한 게 과학자 길을 걷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소개했다. 이후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해 측정분석 분야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아 결정학 분야의 연구자로 본격적인 연구생활을 시작했다. 박 원장의 전공은 X-선을 새로운 물질에 쪼여 나오는 회절강도를 분석해 물질 내부의 원자 구조를 알아내는 'X-선 결정학'이다.
박 원장은 "미지의 새로운 물질을 분석하고, 그 내부의 깊은 곳까지 알아가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고 재미 있어 학위 기간 동안 다양한 물질 내부의 원자 구조를 밝히는 연구에 주력했다"고 말했다.◇'팀제 도입' 등 과감한 조직혁신에 박차=그는 취임 이후 연구 수월성 확보와 연구성과 창출을 위한 연구조직 개편에 역점을 두고, 기존 센터 중심의 조직을 팀으로 과감한 변화를 시도했다. 팀원 간 긴밀하고 유기적인 협업을 기반으로 당면한 이슈에 보다 빠르게 대응하면서 다른 팀과 연구에 있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연구조직으로 '팀'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파격에 가까운 팀제 도입에 내부 연구자들이 반발했지만, 꾸준한 소통과 설득을 통해 360여 명의 박사급 인력을 5명 내외, 60여 개팀으로 새로운 연구 진용을 갖춰 갔다.
팀장에게 권한도 대폭 부여했다. 팀 운영에 최대한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갖도록 했고, 도전적 목표설정을 통해 다양한 국가·사회 현안 및 이슈에 대응하는 연구를 하면서 대형 연구성과를 내도록 제도적 기반을 다졌다. 박 원장은 "평균 4.7명이 하나의 팀을 이뤄 연구할 때 가장 좋은 성과를 내고, 효율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팀제를 과감하게 도입했다"며 "현 시점에서 지난 2년 동안 운영해 온 팀 조직이 당초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고, 무엇이 문제인지 등을 점검하는 팀별 미팅과 토론 결과를 토대로 '최적의 출연연 연구조직 모델'을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대학·출연연 등 개방형 협업 강화로 '연구 수월성 향상'=세계 최고의 수월성을 지닌 팀을 만들기 위해 박 원장은 내부 인력뿐 아니라 대학, 출연연 등과 협업할 수 있는 개방형 시스템을 구축했다.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외부 협업을 통한 개방형 혁신 전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개방형 연구 협업을 위해 처음 만들어진 것이 연세대학교 융합대학원과 함께 설립한 'KRISS-YU 융합반도체 협동과정'이다. 표준연 연구자와 연세대 교수가 한 팀을 이뤄 반도체 원천 소재와 측정표준 분야에서 학생을 공동 지도하고, 융합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또한 일본 수출규제 조치 이후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술자립과 국산화 지원을 위한 'MPI 랩'을 만들어 수보장이라는 국가적 현안 해결에도 적극 나섰다. 최근에는 서울대학교와 탄소중립 분야, KAIST와 양자 분야를 각각 연구하는 외부 협업 조직을 만들었고, 비대면 연구 수행을 위한 '버추얼 랩(가상 실험실)'을 통해 세계적으로 연구 수월성이 높은 해외 연구자와 교류·협업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그는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 우수한 연구인력에 달려 있는 만큼 국가측정표준 분야에서 최고의 연구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연구조직 모델을 구축할 계획"이라고 피력했다.
◇우리의 측정기술로 '세상의 기준'을 만든다=지난해 박 원장은 2035년을 내다보고 '세상의 기준을 만드는 KRISS'라는 새 비전을 선포했다. 대전환의 시대를 세계 최고 수준의 표준과 측정기술의 힘으로 극복하겠다는 표준의 강력한 의지를 대내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이를 위해 단위와 측정, 미래 과학기술, 국민안전, 지구보존, 우주, 데이터 등 총 6개 분야에서 표준연의 역할을 명확히 정했다. 그는 "미래비전 2035은 국가측정표준 확립이라는 표준연 본연의 역할 외에 국제표준화, 법정계량 등 국가표준 전 영역에서 능동적인 기여를 통해 국가 산업 발전과 국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발전 방향과 전략을 폭넓게 담고 있다"고 소개했다.
가시적 성과도 서서히 나오고 있다. 표준연은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참이던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 유전자 표준물질 개발에 성공해 진단키트 개발과 검증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지난해에는 델타바이러스 유전자 표준물질도 개발했다. 측정표준기술이 매우 중요한 자동차 분야에서는 전기차 배터리에 공급되는 전기를 정밀 측정하고, 수소차 충전 시 정확한 수소량을 측정하는 기술을 개발·보급했다. 환경분야에선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실시간 측정하는 기술과 측정값이 정확하지 않은 지구온난화지수(GWP) 측정기술 개발을 통해 국가적 이슈 대응 연구에 결실을 맺고 있다.
박 원장은 "설립 이후 50년 가까이 축적해 온 세계 최고 수준의 측정능력으로 세상의 기준을 세우고, 국민에게 신뢰받는 기관이 되기 위해 국제단위계(SI) 재정의를 비롯해 감염병 팬데믹, 탄소중립, 디지털 전환, 양자, 안전 등의 메가 트렌드 연구에 역량을 집중해 나가겠다"고 피력했다.
◇데이터 신뢰도·양자기술 등 미래 산업 '주도'=박 원장은 표준연의 최대 강점인 정밀하게 측정하는 기술을 다양한 분야에 적용해 미래 국가 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데이터 사이언스, 양자, 첨단 바이오 등 미래 선도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특히 데이터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과연 주변에 있는 데이터 값을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인 정확성과 불확도 측정을 통해 데이터 신뢰성을 높이는 연구에도 주력하고 있다. 물리, 화학, 의료, 보건, 환경 등 다양한 분야의 데이터를 제대로 측정·평가해 신뢰도 높은 데이터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는 "각종 실험 데이터, 3차원 데이터, 동영상 데이터 등 다양하고 방대한 양의 데이터에 대한 신뢰성 평가를 통해 어떤 분야에서든 믿고 쓸 수 있는 표준 데이터를 확립하는 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연구 분야"라며 "AI 신뢰성 및 유효성 검증을 위한 방법론, AI 알고리즘의 불확도 정량화 기술개발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모든 산업에 파괴적 혁신을 가져다 줄 양자기술 개발에도 일찌감치 뛰어 들었다. 2018년 출연연 최초로 양자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양자소자, 양자센서, 양자암호, 양자컴퓨팅 분야의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1960년대 이론만으로 소개됐던 왼손 방향으로 회전하는 스핀파를 세계 최초로 증명해 스핀을 이용한 차세대 소재개발인 스핀트로닉스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원장은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에서 표준연과 같은 출연연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가 기술 안보에 기여할 미래 원천·핵심기술 확보를 통해 기술 선도국으로 나가기 위한 시대적 과제를 출연연이 대학, 산업체 등과 협력해 떠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신냉전 시대에 접어 들면서 자국 중심의 기술 보호와 국익 증진을 위한 각 국의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우리나라가 첨단 과학기술을 무기로 미·중 기술패권 틈바구니에서 레버리지(leverage) 역할을 한층 강화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며 "연구분야별로 수월성을 갖출 수 있는 핵심 조직으로 출연연을 재조직화하고, 연구자에 대한 명확한 임무 부여와 함께 이에 걸맞는 연구 자율성·독립성, 책임성을 명확하는 연구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이준기기자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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