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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기독교 최초 공인 국가… 학살 인정않는 터키와 적대관계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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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코냑, 민족적 자긍심 근원
조지아와 비슷한 시기에 와인 제조
침략에도 고유문자로 정체성 지켜
예레반 인근 문자상징 조형물 조성
터키 학살 피해 전 세계로 흩어져
美·러 등 해외 각지서 공동체 형성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기독교 최초 공인 국가… 학살 인정않는 터키와 적대관계 유지
코라비랍 수도원(Khor Virap)과 아라라트산(Mount Ararat)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북방 프리즘 - 아르메니아: 코냑과 제노사이드(3)


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 3국 중 인구와 영토규모가 가장 적고, 국토의 50% 이상이 해발 2,000m에 위치하며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이다. 아르메니아 영토는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중앙이 소코카서스 산맥(Lesser Caucasus)으로 가로 막혀있고 동부는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남서부는 아제르바이잔의 고립영토인 나흐체반(Naxcivan)으로 둘러싸여 남부지역의 경제발전에 제약이 많다. 이에 따라 소코카서스 산맥너머 남부는 북부에 비해 낙후되어 이다. 아르메니아는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입지와 20세기 초 터키가 자행한 민족학살로 인구도 크게 감소하고, 일부 광물자원 이외에는 별다른 자원도 없어, 우크라이나, 몰도바, 코소보 등과 함께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뒤쳐진 국가이다.

아르메니아는 유럽동부에서 조지아와 같이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 오랜 역사를 갖는 국가이다. 아르메니아 민족은 이미 기원전 860년에 현재의 터키 영토인 동부 아나톨리아와 남코카서스 일대에 우라르투 왕국(Kingdom of Urartu)을 세우고 번영하였다. 당시 우라르투 왕국은 로마동쪽에서 가장 큰 나라였다. 서기 301년에는 아르메니아 왕국이 로마보다 앞서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수도인 예레반(Yerevan)은 기원전 782년에 건설되어 로마보다 오래된 도시로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곳이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기독교 최초 공인 국가… 학살 인정않는 터키와 적대관계 유지
송병준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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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르메니아는 이후 그리스, 로마, 비잔틴 제국, 페르시아, 몽골, 아랍 그리고 터키의 침공과 지배를 받으며 아나톨리아 일대의 영토를 상실하고 남코카서스의 소국이 되었다. 19세기부터는 코카서스 일대로 남하한 제정 러시아에 지배되었다가, 1918년에 잠시 독립하였으나 1920년에 다시 소련의 침공으로 공산화되었다. 이후 1991년에 독립하였지만 곧바로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치르고, 2008년에도 역시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으로 고립영토인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의 상당부분을 상실하여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다.

아르메니아는 이스라엘과 함께 대표적인 디아스포라 국가로 1차 대전 기간인 1915~1917년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추방으로 100만 명이 이상이 사망하였다. 또한 학살을 피해 아르메니아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 미국, 러시아, 레바논 및 프랑스 등지에는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아르메니아는 현재에도 제노사이드를 인정하지 않는 터키와 적대적 관계에 있으며, 국경을 폐쇄하고 최소한의 경제관계만 유지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정체성: 기독교, 문자와 코냑

세계 최초로 공인한 기독교, 고유한 문자 그리고 코냑은 오랜 역사를 갖는 아르메니아인의 정체성과 민족적 자긍심의 뿌리이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Armenian Apostolic Church)는 오리엔탈정교회(Oriental Orthodox)로 가톨릭과 동방정교(Eastern Orthodox)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교회이다. 기독교 도입의 역사가 깊고 아르메니아 교회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조지아 교회는 7세기경 독립하여 동방정교로 분화하였다.

독특한 점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총주교 본부가 적대관계에 있는 터키 아나톨리아의 동남부인 킬리키아(Cilicia)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는 아르메니아가 오랫동안 주변국의 숱한 침략으로 종교적 탄압을 받으며 총주교 본부를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르메니아에서 기독교는 310년 최초의 공인이라는 민족적 자긍심과 외세의 탄압역사를 동시에 보여준다.

아르메니아어는 인도-유럽어족 중에서 발틱 3국 언어와 알바니아어 등과 함께 사용자가 가장 적은 언어로 본토와 해외 아르메니아인을 포함해 사용인구는 약 800만 명에 불과하다. 아르메니아 역시 조지아와 함께 라틴과 키릴문자와 완전히 다른 고유문자를 갖고 있다.

아르메니아 문자는 서기 405년 언어학자이며 사도교회 성인으로 아르메니아 역사의 아버지(Father of Armenian History)로 추앙받는 마슈토츠(Mesrop Mashtots)가 국민들에게 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창안하였다. 문자의 창안으로 아르메니아 민족의 일체감이 형성되어 오랜 외세의 지배 속에서도 아르메니아 민족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

아르메니아 문자를 창안한 마슈토츠는 그리스, 페르시아 및 아시리아 등의 문자를 깊이 연구하여 언어적 활용성 뿐 아니라 조형미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아르메니아 문자는 시각적으로 심미안적인 요소를 지녀 실내장식과 회화 등 다방면에서 문자를 응용한 디자인이 적용되었다. 2005년 아르메니아 문자 제정 1,600년을 맞아 정부 차원에서 예레반 인근에 아르메니아 문자 39개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조성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아르메니아 역시 조지아와 함께 유사한 지형과 기후로 와인제조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헌에는 아르메니아 지역의 와인과 맥주에 대한 언급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조지아가 와인의 종주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르메니아 역시 조지아와 유사한 시기인 기원전 6,000년경부터 와인을 재배하였다. 2011년 아르메니아 남부 아레니 동굴(Areni cave)에서 기원전 6,100년경으로 추정되는 포도를 담은 용기와 압착기기가 발견되어 아르메니아의 와인제조 역사가 조지아보다 앞선다는 주장이 게기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아르메니아는 소련의 지배를 받으면서 와인보다는 코냑이 공산권에서 큰 인기를 얻어 코냑의 나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Joseph Stalin)은 아르메니아 코냑 애호가로 잘 알려져 있다. 1945년 2차 대전 후 세계질서를 논의한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에서 아르메니아 코냑을 접한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역시 아르메니아 코냑에 반해, 스탈린은 매년 400명의 코냑을 처칠에게 선물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러한 인연으로 서방세계로 아르메니아 코냑이 최초로 수출된 곳이 영국이다. 현재도 아르메니아 코냑은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즐긴다.

아르메니아는 20세기 초 터키의 학살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도피하여 해외 각지에서 아르메니아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주목되는 점은 이들 전 세계에 흩어진 아르메니아인과 후손들은 특별히 음악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많은 예술인들이 배출되었다.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프랑스의 국민가수로 대중음악의 신으로 불리는 샤를 아즈나부르(Charles Aznavour)이다. 1924년 아르메니아 이민가정으로 프랑스에서 출생한 아즈나브르는 2018년 94세로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의 국민가수이며 송라이터로 전 세계적으로 1억 8,000만장의 음반을 판매하였다. 그는 부모의 조국을 위해 아르메니아의 외교관으로도 활동하여 아르메니아에서도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미국의 유명한 팝가수 쉐어(Cher)도 아르메니아계이며, 러시아, 터키, 이란과 레바논 등 아르메니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국가에서는 아르메니아계 대중음악인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다. 이외에도 아르메니아는 클래식과 전통음악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정치와 경제

아르메니아는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 후 민주주의 정치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매 선거마다 40여개가 넘는 정당이 난립하고 정치권은 무능하고 부패하여 불안정한 정정이 이어지고 있다. 아르메니아 역시 조지아와 유사하게 정치권의 부패로 시민혁명을 겪었다.

2008부터 10년간 대통령을 역임한 세르지 사르키샨(Serzh Sargsyan)는 2018년 퇴임 후에도 총리직을 역임하며 권력을 누리다 결국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으로 실각하고, 같은 해 니콜 파시냔(Nikol Pashinyan) 총리가 취임하였다. 전임자와 달리 반러시아 성향이 강한 파시냔 총리는 러시아에 대한 의존완화를 위해 친유럽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2020년 9월 2차 나고르로-카라바흐 전쟁에서 아르메니아의 패배로 파시냔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거센 퇴진 압박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이 아르메니아는 독립 이후 30여년이 넘게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로 불안정한 민주주의 체제가 지속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여건과 취약한 경제기반으로 국가의 생존을 위해 벨라루스와 유사하게 러시아에 경제와 군사 등 다방면에서 의존관계에 있다. 동시에 아르메니아는 친유럽연합과 친미노선을 취해 경제적으로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특히 미국에는 제노사이드를 피해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이 거대한 공동체를 형성하여 의회와 행정부에 친아르메니아 정책을 이끄는 압력단체 역할을 한다. 아르메니아는 현실적 이유로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장기적으로 유럽연합 가입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정치, 경제적 낙후와 러시아의 영향력으로 현실적으로 유럽연합 가입은 요원하다.

아르메니아는 공산주의 시절 소련의 정보통신과 반도체 등 첨단산업지역으로 독립 직후 미국의 정보통신기업들이 다수 아르메니아에 지사와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현재에도 정보통신분야는 아르메니아의 주요 산업이지만 교육과 연구기반이 미비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리적으로 아르메니아는 내륙국가로 영토의 좌우에 위치한 터키와 아제르바이잔과 국경이 폐쇄되어 교역은 조지아와 이란을 경유하여 이루어진다. 또한 러시아로부터 에너지 수입에 의존한 가운데 아제르바이잔과 영토분쟁으로 국력을 낭비해 경제적 상황이 매우 열악하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고질적인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만연으로 지하경제규모가 GDP의 약 1/3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2020년 나고르노-카바라흐 전쟁에서 패하고 코로나 펜더믹으로 유럽연합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지원이 줄어들고, GDP의 10~15%를 점하는 해외거주 아르메니아인의 송금액도 감소하여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

2021년 기준 아르메니아의 인구는 300만 명을 다소 상회한다. 그러나 전 세계 각지에 최소 550만 명에서 8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과 그 후손이 흩어져 살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오랜 역사와 외세의 침략으로 이스라엘, 터키,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및 이란 등 인근 국가에 오래전부터 공동체를 형성해 거주하였다. 또한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로 러시아를 비롯해 CIS 전역에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본토보다 많은 아르메니아인이 해외에 거주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세기 초 오스만튀르크의 제노사이드이다. 당시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대학살을 피해 단기간에 걸쳐 유럽과 미국 등지로 이주하였다. 이 결과 아르메니아는 아일랜드, 이스라엘과 함께 대표적인 디아스포라 국가가 되었다. 아르메니아는 정부 내에 해외거주 아르메니아인을 관리하는 부처를 두고 지원과 투자유치 등 다양한 업무를 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GDP의 약 10~15%는 해외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송금으로 충당되고, 이들은 해외 각지에서 제노사이드를 알리고 국제적 인정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지역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과거 소련연방내 지역이며 이어서 미국과 프랑스에 다수의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여 현지에서 거대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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