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대동아전쟁` 80주년… 사무라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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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대동아전쟁` 80주년… 사무라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지난 12월 7일로 '대동아전쟁' 개전 80년을 맞았다. 1941년 12월 7일(도쿄 시간 12월 8일) 화창한 일요일 아침, 평화로웠던 진주만은 180대가 넘는 일본 전투기가 출현하면서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2시간도 안돼 미 태평양함대의 심장부가 쑥대밭이 됐다. 동시에 동남아시아의 미국·영국·네덜란드 식민지를 점령해 나가는 일본군의 '남방작전'도 개시됐다. 전쟁은 아시아 해방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침략전쟁은 일본의 패망으로 끝났다. 하지만 아직도 대동아전쟁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재앙으로 끝난 도박

대공황이 터지기 전까진 미일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대공황 이후 광적인 국수주의가 팽창하면서 일본은 군국주의의 광기에 휩싸였다. 1937년 7월 중국 본토를 침략했고, 3년 뒤에는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등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출했다.

이는 미국의 견제를 불렀다. 1941년 여름 미국은 일본의 해외금융자산을 동결했고 석유·철강 금수조치를 내렸다. 석유의 80%를 미국에서 수입해온 일본은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전쟁까지 갈 것이라곤 누구도 예상 못했다.

이때 일본에 새 지도자가 등장했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였다. 금수조치 두달 반 뒤 그는 총리로 임명됐다. 그는 비밀리에 전쟁 계획을 짰다. 12월 7일 미국은 허를 찔렸다. 기습은 진주만만 당한게 아니었다. 진주만 공습 1시간 전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 중장의 3만 병력은 말레이반도 북부에 상륙했다. 얼마 후 필리핀 클라크 기지에도 일본 폭격기가 출현했다. 그 곳의 미군 항공력은 대거 손상됐다. 미국인들의 충격은 분노로 바꿨다. 진주만 공습 32시간 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일본은 확전으로 나갔다. 1942년 초 말레이를 점령했고 남진해 2월 15일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싱가포르에 있던 13만명이 넘는 병력이 항복했다. 거의 동시에 홍콩의 영국군이 공격을 받았다. 2주만에 홍콩도 넘어갔다. 필리핀 현지 미군사령관 맥아더는 자존심에 금이 간채 3월 초 호주로 철수했다.

이제 미국도 반격을 해야만 했다. 1942년이 되자 일본 해군은 솔로몬 제도로 진출했고 5월에는 산호해(珊瑚海)로 진입했다. 파푸아뉴기니 장악이 목적이었다. 당시 연합함대 최고사령관은 '군신'(軍神)으로 불렸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였다. 하지만 그가 유일한 최고사령관은 아니었다. 산호해 건너편에는 미국 최고의 제독이 버티고 있었다. 태평양함대 총사령관 체스터 니미츠였다.

양국의 함대들은 기존 해전의 개념을 바꿔놓았다. 전통적으로 군함간 교전은 포격전이었다. 바다에서 보이는 적을 상대로 포를 쏘는 것이었다. 새로운 해전의 중심에는 항공모함과 전투기가 있었다. 모든 것이 바꿨다. 서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공중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함포는 방어용으로 쓰이게 됐다. 이러다 보니 정보·병참 업무가 중요해졌다. 적 위치를 먼저 파악해 전투기를 띄어야 승리할 수 있었다.

산호해 해전에선 서로가 무승부를 기록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과 대등하게 싸움으로써 일본군의 무적신화를 깨뜨렸다. 미국은 그 기세를 몰아가야 했다. 때마침 광장한 무기가 개발됐다. 일본군 암호를 해독한 것이다.

1942년 5월 말 미군은 암호해독을 통해 일본군이 미드웨이 환초를 공격할 것이란 정보를 알아냈다. 6월의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에겐 재앙이었다. 4척의 항모가 침몰됐고 2000명 이상의 병력이 수장됐다. 일본의 결정적 패배였다. 이제 바다를 지배하는 건 미국이 됐다.

하지만 전쟁의 끝은 여전히 멀었다. 몇 년 동안 섬 하나하나를 뺏고 빼앗기는 유혈 낭자한 전투가 이어졌다. 마침내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소련이 참전했다. 일본은 8월 15일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무조건 항복했다. 9월 2일 항복문서에게 조인하면서 일본의 도박은 실패로 끝났다.

◇대동아전쟁인가, 태평양전쟁인가

1941년 12월 10일, 제국 일본의 대본영은 이 전쟁을 "지나사변(支那事變)을 포함하는 대동아전쟁으로 호칭한다"고 결정했다. 지나는 일본에서 중국을 비하해 부르는 호칭이다. 지나사변은 중일전쟁을 말한다. 중일전쟁까지 포함해 현재 치르는 전쟁을 '대동아전쟁'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다만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7월 7일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이후 중국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까지 포함한다는 뜻이다.

당시 대본영 회의에선 명칭과 관련해 대동아전쟁 외에 '태평양전쟁' '대미영(對美英)전쟁' '흥아(興亞)전쟁' 등의 안이 나왔다. 토의 결과, '대동아 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만들기 위해 '미영귀축'(米英鬼畜)과 싸운다는 의미를 강조하려면 대동아전쟁이 가장 알맞다는 결론을 냈다. 이틀 후인 12일 도죠 내각은 "새 전쟁의 명칭은 대동아전쟁이며, 전쟁의 목적은 대동아 신질서 건설에 있다"고 발표했다.

이후 일본은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킨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모순이었다. 실상은 아시아인이 같은 아시아인에게 자행한 제국주의 침략이었다. 일본이 벌인 전쟁은 철저히 일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대동아전쟁은 일본의 처절한 패배로 끝났고 엄청난 비극을 낳았다. 수많은 군인들이 전사했지만 막대한 민간인 희생도 동반했다. 미국은 1944년 10월부터 약 9개월 동안 일본 열도에 폭탄을 쏟아부었다. 폭격으로 도시 수십 곳이 파괴됐고, 그 과정에서 민간인 100만여명이 사망했다. 특히 두 차례 핵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의 압도적 다수는 민간인이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희생자들은 더 많았다. 가장 큰 피해는 중국이 입었다. 중일전쟁 개전 이후 8년 동안 일본과 전쟁을 치르면서 최소 1200만명이 사망·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인 50만명도 만주, 동남아, 태평양의 섬에서 죽어갔다.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대동아전쟁'이란 명칭은 금지됐고 '태평양전쟁'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태평양전쟁'이라는 호칭은 미국에게 있어 태평양에서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또한 이 기회에 태평양의 패권을 장악겠다는 의도도 담겨있다. 이렇게 일본과 미국이 부르는 전쟁의 이름이 다른 것은 두 나라의 전쟁 목적과 전략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로 인한 피해를 입었던 한국과 중국은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이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면서 전쟁의 목적을 미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때문에 일각에선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전쟁 책임을 고려하여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日 극우보수의 '반성 없는' 행보

대동아전쟁이란 명칭은 현재 일본 내에서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극우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을 옹호하는 입장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자민당 부총재가 대표적이다, 그는 2019년 9월 자위대 고급간부 회동 간담회의 건배사에서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을 써 비판을 받았다. 2020년 3월에도 그는 '대동아전쟁'이라고 표현하는 망언을 또 했다.

침략전쟁과 주변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대동아전쟁'이란 단어를 주요 정치 지도자가 입에 올리는 것은 위험 수위에 다다른 일본의 우경화를 보여준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일본 극우 보수층의 목표는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 이를 통해 '대일본제국'을 복원하는 것이다.

도쿄도(東京都) 지사를 지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는 아예 핵무장까지 주창한다. 불행히도 이는 일반 일본인들에게도 먹혀들기 시작한 듯하다.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자들과 그 지지자들은 메이지(明治)유신으로부터 자라난 민주주의와 입헌정치를 쇠퇴시키고 암살과 정치적 탄압이라는 수단으로 일본을 전쟁의 길로 몰아갔다. 지도자들의 잘못된 결단의 결과로 인해 자국은 물론 인근 국가의 국민들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주었던 것이다.

대동아전쟁이 발발한 지 80년을 맞았다. 전쟁의 발톱자국은 깊었다. 그럼에도 국제사회는 '전범국가' 일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일본의 극우 보수세력은 과거의 선택을 반성하고 전쟁이 준 교훈을 재확인해야 한다. 반전·평화야 말로 보다 나은 미래를 여는 길이라는 것을 각인해야만 한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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