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정극의 메카에서 여성연극을 이끌다

입력: 2021-11-1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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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90년대 산울림 극장서 女중심 연기펼쳐
하나를 위한 이중주·목소리·딸에게 보내는 편지
세개의 대표작으로 '윤석화 아카이브' 보일 예정

'딸에게 보내는 편지' 중 윤석화.

월간객석과 함께하는 문화마당

배우 윤석화

윤석화(1956~)는 '산울림 황금기'를 이끈 주역이다. 1992년도 주요 일간지 문화면을 살피면 윤석화의 이름이 자주 올라와 있다. 극단 산울림이 선보인 모노드라마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첫 공연부터 입석 사태가 벌어졌고,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다 연장 공연까지 진행했다는 소식이다. 관객은 주로 20~40대 여성이며, 한 달 전에 좌석을 예약해야 원하는 날 겨우 공연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윤석화와 박정자(1942~), 손숙(1944~)은 1985년 문을 연 소극장 산울림의 '여성연극'을 이끌었다. '정극의 메카'라 불린 산울림이 한국연극사에 남긴 굵은 공적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지속적인 리바이벌 공연, 1980~1990년대에 페미니즘 연극을 유행시켰다는 점이다. 임영웅이 연출한 '위기의 여자'(출연 박정자)를 시작으로,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담배피는 여자' '딸에게 보내는 편지' 등을 통해 여성을 내세운 작품을 주로 선보였다. 소극장 산울림은 개관 후 1999년까지 60회 정기 공연 중 여성연극이 26회에 이른다.

윤석화는 산울림 단원들과 동고동락하며 청춘의 시절을 연극에 쏟아냈다. 어느덧 데뷔 50주년을 앞두고 있는 그는 고향과도 같은 이곳에서 자신의 아카이브 작업을 시작한다. '윤석화 아카이브' 시리즈의 첫 시작인 '자화상 I'에선 첫 산울림 무대였던 '하나를 위한 이중주', 임영웅 연출가와의 첫 작업이었던 '목소리', 그리고 장기 공연의 신화를 이끌어낸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올린다. 긴 연기 인생 속에 유독 강렬한 인상을 남간 장면을 되새기는 일은, 배우 윤석화가 무대 위에서 그리고자 하는 자화상이다.

△코로나로 인해 공연계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물론 코로나 때문에 많은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020년 10월에 예정된 런던 공연이 2021년 4월로 연기됐다. 그 역시 무산되고 말았고…. 나뿐만 아니라 많은 공연 관계자들이 힘들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라는 상황이 없으면 소극장 공연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요즘은 이 공연을 앞두고 체력과 호흡을 단련하고 있다.

△고향과 같은 무대에 다시 서게 됐다. 산울림과의 첫 만남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이번 공연에선 총 세 작품('하나를 위한 이중주' '목소리' '딸에게 보내는 편지')을 선보인다. '하나를 위한 이중주'는 1988년에 산울림과 첫 인연을 맺어준 작품이다. 당시 나는 관객에게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 갈급해 있었다. 그러던 중 뉴욕 한 책방에서 우연히 이 대본을 만났다. 조금 어렵지만 좋은 작품이었다. 배우가 직접 작품을 찾아내 연극으로 기획하는 것이 낯선 시대였다. 당시 임영웅 선생님은 호랑이 연출가로 유명했다. '혼나더라도 얘기나 해보자, 아니면 뭐 말고' 이런 심정으로 임영웅 선생님을 찾아뵀는데 너무 반겨주셨다.

△그 대본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산울림을 떠올린 이유는.

-임영웅 선생님께서 내가 출연한 어떤 공연을 보고 칭찬하셨다는 후문을 들은 적이 있다.(웃음)

△이후 장 콕토(1889~1963)의 1인극 '목소리'는 임영웅 연출가와 함께한 첫 산울림 작업이었다. 전화기 하나에만 의존한 채 여배우 한 명이 오롯이 무대를 감당해야 하는 새 도전이었는데.

-5개월 동안 '하나를 위한 이중주' 공연을 이어갔다. 이후 임영웅 선생님이 '목소리'라는 모노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다고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1인극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사했는데 거의 반년 동안 임영웅 선생님께서 '넌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어 용기를 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을 통해 산울림의 여성 1인극 흥행에 큰 기여를 하게 됐다. 처음 이 작품이 두려웠던 이유가 궁금하다.

-장 콕토의 작품은 멋있다. 그런데 우선 내가 완벽히 이해해야 그걸 관객에게 질문으로 내놓을 수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오랫동안 이 작품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고등학교 때 즐겨 들었던 메조소프라노 안나 모포의 LP를 다시 틀었다. 그리고 '목소리'의 대본을 읽는데 신기하게도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

△이후 국내에 모노드라마 열풍이 불었다.

-예상과 달리 많은 관객이 큰 사랑을 주어서 버겁더라. 혼자서 몇 개월을 공연한다는 건 역시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뜨거운 인기를 몸소 실감했나.

-공연 몇 시간 전에 분장실에 오면 이미 관객이 나보다 먼저 산울림에 도착해 표를 구하고 있었다. 쭉 서 있는 관객을 보면서 분장실에 들어가곤 했다. 그런 관객을 보면 무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8년부터 미국에 가기 전까지 약 5년 동안 산울림 전속단원처럼 매일 극장에 출근했던 것 같다.

△이후 인기의 정점을 찍은 건 '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신의 아그네스' 이후 대중에게 배우 윤석화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준 전설적인 공연이다. 단 한 번의 암전도 없이 90분 동안 무대를 지키며 연기와 노래를 선보였다.

-그 작품이 가진 에너지가 엄청나다. 당시 우리나라에 기립박수 문화가 없었는데도 앙코르가 쏟아지곤 했다. 극작가 아널드 웨스커(1932~2016)는 이 작품에 '노래할 수 있는 여배우를 위한 다섯 대목의 연극'이라고 명명해 놓았다. 작품에 다섯 곡의 노래가 나오는 점이 관객을 이끌었던 것 같다. 지금은 뮤지컬이 많지만, 그때만 해도 이러한 형식이 흔하지 않았다. 관객은 마치 뮤지컬을 보는 묘미를 느껴 더욱더 열광했던 것 같다.△세 개의 작품을 다시 꺼내 보았을 때 새롭게 와닿은 게 있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진 않다. 다만 깊은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삶의 시간 여행 중에 스스로 얻어낸 지혜, 경험이 가르쳐준 현명함 같은 것이 조금은 쌓였을 테다. 다만 지금 나는 70세를 바라보고 있다. 노배우인 내가 이 30대 역할을 무대에서 어떻게 해낼지가 가장 새로운 게 아닐까. 요즘 연습하면서 입버릇처럼 '내가 미쳤지, 미쳤지' 얘기한다. 이 어려운 작업을 무모하게 도전하다니…. 하나 하기도 벅찬 작품들인데.

△그 무모함이 지금의 배우 윤석화를 있게 하지 않았을까.

-뜻이 생기면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어쩌면 바보스럽고 미련한 내 성향 때문에 지금까지 연극을 해온 것 같기도 하다. 때로는 기특한 마음도 든다.

△결이 다른 세 작품이 어떻게 한 무대에서 엮일지 궁금하다.

-처음에는 명장면을 발췌하려고 했다. 그런데 작품을 구성하면서 빼면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걸 느꼈다. 단순히 명장면 퍼레이드로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연결고리를 찾아 확장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개막이 다가올수록 악몽을 꾸며 몸부림을 치지만 그래도 해낼 것이라는 용기를 갖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국내에 일명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현재 연극계에서도 여성연극에 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선배 연극인으로서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세상의 본질을 열심히 생각하게 되면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한다. 예술을 통해서 진정한 문화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슬로건이 문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이 사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 본인이 느껴야 한다. 예술은 생각의 거울이다. '여성연극'으로 한정 짓고 싶지는 않지만, 이 현대 사회에서 연극이 어떤 거울이 되어줄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코로나로 많은 인원이 무대에 오르기 힘들어서 그런지, 최근 1인극이 자주 올라오고 있다. 올해 공연한 민새롬 연출의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나 양손프로젝트의 '데미안'도 주목할 만한 1인극이었다.

-모노드라마는 사실, 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웃음) 연극은 종합예술이어서 모두가 다 같이 어우러져야 하는데, 이걸 무대에서 혼자 다 책임지는 건 정말 힘들다. 그러나 또 배우라면 한 번 정도는 그 치열한 싸움을 해보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대 위에서의 자화상

△1974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했다. 곧 데뷔 50주년을 맞는다. 이번 '윤석화 아카이브' 작업은 지난 연극 인생을 정리하는 작업인 걸까.

-그렇지는 않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이 자리에 있었고, 아마 내일이라 불리는 그 어느 날에도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연극을 한 지 50년이 되어가니까 그동안 해왔던 걸 다시 한번 돌아본다고 생각해 주면 좋을 듯하다. 또 앞으로 내가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를 바라보게 해줄 수도 있고.

△예전에 그토록 뜨거웠던 가슴으로 극장에서 만났던 관객들이 이제 부모 세대가 됐을 텐데.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러 왔던 관객이 대부분 어머니가 되어 다시금 딸을 데리고 소극장 산울림을 찾을 것이라 예상한다. 그때 빛나던 자신을 되돌아보는 건 우리를 살게 해주는 소중한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 작품 중 하나라도 보신 분이 이번 공연을 찾는다면 다시 이전의 꿈을 소환할 수 있을 테다. 그리고 세대 간의 소통에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윤석화 아카이브'는 소극장 산울림을 시작으로 하여, 2·3편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70세가 되기 전까지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진행하고 있다. 소극장 산울림 편을 시작으로 다음에는 예술의전당 편을 구상 중이다. 예술의전당에서 선보였던 '덕혜옹주' '명성황후' '마스터 클래스' 세 작품을 두 번째 아카이브로 선보인다. 그리고 사라진 극장 편도 준비 중이다. 나름대로 대표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연극을 올렸던 극장들이 이미 사라진 경우가 있다. 사라진 극장 편은 '신의 아그네스' '나, 김수임' '위트'를 올리고자 한다.

△운영난을 겪은 소극장이 줄줄이 폐관하며 역사도 함께 소멸되고 있다. 뜻깊은 작업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기억에 남는 소극장은 어디인가.

-'신의 아그네스'는 종로구 운니동에 있던 실험극장에서 공연됐다. '나, 김수임'은 대학로 동숭아트홀에서 공연했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연극계에 뛰어든 후배 연극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정말 연극배우가 되고 싶다면 오래 하라는 얘기 밖에 해줄 말이 없다. 요즘은 연극만을 고집하기가 어려운 세상이다. TV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는 후배들을 보면 박수 쳐주고 싶다. 내가 못한 걸 잘 하는 친구들이기에 대견스럽고 사랑스럽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다시 연극계로 돌아오지 않을까봐…. 그리고 연극만을 고집하는 친구들은, 가뜩이나 연극이 소외된 순수예술인데 상대적으로 더 소외될까 걱정되는 건 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다 자신이 선택하는 거다.

△배우 윤석화는 앞으로 한국연극사에 어떻게 기록되기를 바라나.

-그런 욕심 없다. 사실 나는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서 연극을 선택했다. 연극을 하는 중에도 영화나 음반, TV 드라마의 유혹을 많이 받았지만, 나는 연극배우로만 살고 싶었다. 갑자기 유명세를 치르면서 평론가들에게 편견과 비난을 많이 받기도 했다. 나를 배우로 봐주지 않고 그냥 스타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래 하다 보니까 이제 나를 단순한 스타가 아니라 진짜 연극배우로 보더라. 나와 만난 관객이 몇 시간만이라도 행복하다면 충분하다.

글=월간객석 장혜선기자·사진=소극장 산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