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병일 칼럼] `품격의 정치` 희망 버릴 수 없다

예병일 플루토미디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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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1-26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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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병일 칼럼] `품격의 정치` 희망 버릴 수 없다
예병일 플루토미디어 대표
'품격의 정치'에 대한 희망은 버릴 수 없다.

2년 전, 늦여름이었다. TV 화면에 미국 애리조나의 넓은 평야가 보였다. 멀리, 작은 시골길을 장례 운구차량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 농부가 차량이 지나가는 길가에서 홀로 나무판자를 들고 서 있었다. 손으로 쓴 커다란 글자가 보였다. "당신의 노고에, 봉사에, 감사합니다(Thank You For Your Service)". 2018년 8월25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한 미국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실은 운구차량이었다. 자택에서 애리조나의 주도 피닉스로 향하는 장면을 생중계하던 CNN 화면 하단에는 '미국의 영웅'이라는 문패가 선명히 빛났다.

미국의 46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승리를 선언했다. 승복하지 않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보면서, 2년 전의 그 운구차량 모습이 떠올랐다. 매케인과 트럼프.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품격'(dignity, class)은 품위, 기품이라는 단어와 함께 하는 말이다. 반대로 우리는 거칠고 속되거나 이기적인 행동을 볼 때 '품위가 없다'고 한다.

매케인은 품격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정치인이었다. 1967년 베트남 전쟁에서 비행기 격추로 5년 넘게 포로생활을 하며 고문을 당했지만, '태평양 지구 총사령관'이었던 그의 부친을 의식한 월맹군의 우선 석방 제안을 거절했다. 2008년 대선 유세 중 한 지지자가 오바마의 인종을 문제 삼으며 비난하자, "오바마는 품위 있는 가정의 미국 시민"이라며 옹호했다.

유세 당시 반대 여론이 높았던 이라크전 증파안을 옹호하면서는 "조국이 전쟁에서 지는 것보다 내가 선거에서 지는 편이 더 낫다"고 했다. 그는 포로 생활을 끝낼 수 있었고, 오바마의 인종을 공격할 수 있었고, 여론에 편승할 수도 있었다. 손해를,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옳다고 믿는 것을 선택하는 것. '품격'이란 이런 것이다. 반면에 트럼프는 '이단아'였다. 세계가 익숙했던 과거 미합중국 대통령의 모습과 달랐다. 폭풍 트윗으로 국정을 수행했다. 거칠고 속된 표현을 트윗을 통해 날렸고 돌출적인 선택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때론 '날 것 그대로'를 솔직하다, 시원하다, 매력적이다라 생각하며 열광한다.

그 트럼프가 패배했다. '매케인의 애리조나'에서 진 것이 뼈아팠다. 애리조나는 매케인과 공화당의 텃밭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미망인 신디 매케인은 바이든을 공개 지지했다. 두 사람은 2016년 트럼프의 대선 출마 이후 사사건건 대립했고,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포로로 잡힌 매케인이 무슨 영웅이냐"라고까지 폄하했었다. '날 것의 트럼프' '품격의 매케인'이 살아있을 때는 그를 이겼다. 매케인은 대통령이 못됐지만,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매케인 사후, 2020년에 트럼프는 매케인에게 패배했다. 누가 이긴 것인가.

어쨌든 올해 대선은 바이든의 승리로 정리되고 있다. 날 것이 드러나 생소했고, 롤로코스터를 탔던 미국의 정치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인가. 반전의 계기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결과는 알 수는 없다. 득표율은 11일 현재 바이든 50.7%, 트럼프 47.5%. 트럼프를 찍은 미국인이 7200만 명이 넘는다. 결코 '몰락'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제2, 제3의 트럼프가 나올 수도 있다는 의미다.

공화당은 다시 '매케인의 공화당'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4년 후 대선에서 어떤 후보를 선출할까. 기회를 상실하고 절망에 빠진 지지자들의 정서를 '날 것'이 아닌 '품격'이라는 방식을 통해 이해하고 대변할 수 있을까. 이것이 혼돈의 미국 정치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미 대선은 끝났고, 이제 우리는 시선을 한국으로 돌려야 한다. SNS 정치와 팬덤 정치의 부작용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맹목적으로 자기편만 지지하고, 염치는 실종되고, 품격 없는 '날 것'이 득세하고, 합리적인 대책이 아니라 '사이다 발언'이 주목받고 있는 정치. 한국은 어떻게, 언제, 반전의 계기를 잡을 것인가. 비이성적이지만 날 것이고 달콤해서 매혹적인 'B급 포퓰리즘'이 득세할 것인가, 합리적이지만 점잖고 밋밋해서 재미는 없는 '품격의 정치'가 지지를 받을 것인가.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격의 정치에 대한 희망은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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