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DT현장] 이건희시대 다시 볼 수 있을까](http://contents.dt.co.kr/images/202010/2020102702102269781001[1].jpg "[DT현장] 이건희시대 다시 볼 수 있을까")
당시 30대 초반이었고 기자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이 회장을 보니 기업경영인보다는 매몰찬 자본가로 보여 무서웠다. 삼성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12년 삼성을 다시 취재하기 시작하면서다. 마치 '악의 제국'과 같았던 삼성이 점차 '물건 하나는 잘 만드는 똑똑한 집단'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의 성장과정에서 나타난 빛과 어둠에 대해서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어느덧 세계 속에 빛나는 삼성을 국내가 아니라 외국에서 볼 수 있었다. 세계 최대 가전·IT(정보기술) 전시회인 소비자가전쇼(CES)를 비롯한 글로벌 국제 전시회에서 접하는 삼성의 위상은 해가 갈수록 높아졌다. 이제는 외국에 나가서 '코리아' 하면 '삼숑'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만큼 국가대표 기업으로 변모했다. 이는 숫자로도 나타난다. 한국경제연구원이 S&P 캐피탈의 자료를 바탕으로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2008년 775억 달러에서 2018년 3198억 달러로 4배 이상 늘었다. 세계 1위 품목 역시 2008년 5개에서 현재 13개로 늘었다. 삼성그룹의 매출은 2018년 기준 한국 GDP의 20%를 차지한다.
말 그대로 한국 1위 삼성이 세계 1위 삼성으로 바뀐 것이다. 이 같은 '초격차 성장' 덕에 삼성의 주식 시가총액은 이 회장이 취임할 1987년 당시 1조원에서 2018년 396조원으로 감당 못할 만큼 커졌다. 삼성의, 그리고 이 회장의 공·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앞으로 다시는 이 회장이 이뤄낸 '초격차' 성장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점이다. 제조업 수출로 성장하던 그 자리는 변수는 있지만 중국이 대체하고 있고 이제는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로 또 넘어가고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도 앞으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매번 느슨해질 때마다 '위기론'을 내세우며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던 이 회장 방식의 경영도 이제는 주52시간 근무제 등 법적 제약으로 사실상 어렵다. 아마도 지금도 6시 출근을 칼 같이 지키는 현 임원들이 지나가고 다음 세대가 요직을 차지할 때면, 이 회장이 만든 조기 출근 문화는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뉴 삼성'을 외치며 조직문화 혁신을 추진하는 점 역시, 아버지 방식의 경영으로는 더 이상 성장에 한계가 있음을 느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소품목 대량 생산 구조에서 맞춤형 시대로 넘어감에 따라 이제는 시간보다는 창의력이, 노력보다는 성과가 더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창업 세대가 끝나고, 성장기인 2세대도 끝났다. 이제는 혁신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3~4세대에 진입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그만큼 불확실성도 심해지고 있다. 이건희 회장을 비롯해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 등이 주도했던, 창업 세대를 이은 소위 '불도저' 식 성장 경영은 이제 부담이 너무 크다.
그럼에도 어쩌면 조만간 이건희 식 리더십이 다시 그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성장의 답을 선택하고, 자신감 있게 밀어붙이는 책임 있는 리더십 말이다. 이는 재계 뿐 아니라 정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방식은 과거 이 회장 때의 성장 일변도로는 다소 어려울 것이다. 선순환과 동반성장, 책임경영이라는 리더십을 '뉴 삼성'을 이끌 이재용 부회장에게 기대해 본다.
고(故) 이건희 회장은 1994년 신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가슴 벅찬 미래를 향한 출발선상에 서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초일류이며, 방향은 하나로, 눈은 세계로, 그리고 꿈은 미래에 두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 갑시다" 라고. 대한민국의 도약과 성장기를 이끈 이 회장이 눈부신 업적을 남기고 떠난 이 날, 우리는 새로운 초일류 미래를 꿈꾸고 있다.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comja7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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