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덩칫값 못 하는 産銀

성승제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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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T현장] 덩칫값 못 하는 産銀
성승제 산업부 기자
"산업은행의 역할이 점점 커지지만 관리 능력은 아마추어 같은 느낌이 듭니다."

최근 만난 한 산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금융권을 10년 남짓 출입했지만 산업은행은 늘 관심의 대상에서 비껴갔다. 산은은 특수은행으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 시중은행과는 역할이 다르다. 시중은행은 기업과 개인고객을 중심으로 한 대출 또는 예·적금 상품 판매와 각 금융사별 실적, 채권, 금융시장 동향 등에 관심을 갖지만 산은은 산업의 개발·육성, 사회기반시설 확충, 지역개발, 금융시장 안정화 등에 역량을 집중한다. 금융서비스업은 전체 사업 비중의 10%도 채 안된다.

산은의 진가는 산은 자금을 수혈 받은 한국GM 등 국내 주요기업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면서 부각되고 있다. 산은은 갑(甲) 중의 갑이다. 산은의 말 한마디는 회생 절차를 밟는 기업에겐 생존과 직결된다. 두산그룹이 산은이 제시한 자구안 대책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업계에선 슈퍼 갑 공공기관치곤 관리 능력이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이사를 선임하고 경영 관여도 하는 상황이라면 부실에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

아시아나항공을 예를 보자. 이동걸 산은 회장은 본인 1기 임기 종료를 한 달여 앞둔 지난 8월 정몽규 HDC그룹 회장과 세 번의 회동을 갖고 아시아나항공 인수 건을 논의했다. 당시 '마지막 회동' 또는 '최종담판'이란 수식어처럼 두 사람의 만남은 시장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비공개 회담은 1시간 가량 진행됐다. 사실 관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이 과정에서 이 회장이 정 회장에게 아시아나항공 인수 가격을 깎아주고 재실사 기간도 일부 연장해주는 방안을 제안했다고 전해진다. 협상 결과는 빈손이었다. HDC그룹은 12주간의 재실사가 필요하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고, 결국 계약당사자인 금호산업은 HDC그룹에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코로나19 영향도 있지만 애초에 HDC그룹의 마음을 되돌리기엔 산은이 보유한 카드가 약했다는 평가다. 그런데도 정 회장이 이 회장 제안에 응한 것은 산은의 입지를 무시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란 게 업계의 전언이다.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의 정치권 인맥이 두껍고 산은이 산업계에서 슈퍼 갑이라는 점을 HDC그룹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 회장은 최근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전 대표의 전기 만화책 출판기념회에서 민주당의 20년 집권을 기원한다는 내용의 건배사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스타항공 대책안은 뼈 아프다. 이 회장은 추석을 앞둔 지난달 28일 온라인 기자회견을 통해 이스타항공에 대한 기간산업안정기금(기안기금) 지원은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이는 시장에서도 예견한 일이다. 다만 산은의 확인 사살로 이스타항공에 남은 576명의 직원들마저 살얼음판을 걷게 됐다. 이스타항공은 앞서 605명에게 해고통지서를 보낸 바 있다.

쌍용차와 한국GM은 크게 달라진 내용이 없다. 쌍용차 구조조정에 대해선 기업 존속 가능성을 가장 염두에 두고 보겠다고 한 반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한국GM 노조에 대해선 불가하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재확인했다. 산은은 올해 말 만기를 연장해준 900억 원의 대출금을 포함해 쌍용차에 총 1900억원을 지원했다. 한국GM에겐 2018년 2월 80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한 바 있다. 공적 자금을 투입하면서도 경영정상화에 대한 뾰족한 해법은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계에선 2016년 파산한 한진해운 사태를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진해운은 유럽 대형 선사들의 치킨게임으로 희생된 국내 대표 기업 중 하나다. 한진해운은 국내 1위, 세계 7위의 선사그룹이었다. 파산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정부의 과도한 부채 관리와 무리한 재무구조개선 요구로 알짜 자산을 매각하면서 경쟁력을 잃은 것도 주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해운업계와 최근 산업계의 상황이 묘하게 겹친다. 코로나19로 내부보다는 외부적 요인으로 위기를 겪는 기업들이 많아졌다는 얘기다. 재계가 산은의 역할론을 강조한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회장은 대외 악재로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기업들을 구제하는 방안을 하루 속히 내놓는 데 집중하길 바란다.

성승제기자 bank@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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