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한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대형연구시설기획연구단장
![[기고] 과학기술발전전략, 과학기술인이 주도해야](http://contents.dt.co.kr/images/202009/2020092102102369660001[1].jpg "[기고] 과학기술발전전략, 과학기술인이 주도해야")
1937년, 당시 조선에선 과학과 관련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을까. 발명학회를 만들어 조선 과학기술의 독자적 발전을 기획했던 김용관은 다윈 서거 50주년인 1934년 4월 19일을 '제1회 과학데이'로 지정했고,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과학의 날이 되었다. 이듬해 경성과 평양에서 시행된 과학데이는 전년도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조선 민족의 자각을 원하지 않던 일제총독부는 1937년 과학데이 행사를 제지하고 김용관을 반일 혐의로 투옥했으며, 발명학회를 비롯해서 과학과 관련한 모든 모임을 해산해버렸다. 일제가 조선의 과학기술에 대한 싹을 잘라버렸던 바로 그 해 1937년에, 리켄연구소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이클로트론 가속기를 독자적으로 건설했을 정도로 당시 일본의 과학역량은 세계정상 수준에 올라있었다.
미국의 어네스트 로렌스는 1932년 현대 가속기의 초기형태인 사이클로트론을 제작했고, 1939년에 그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물리학자들은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해 양성자나 중이온 같은 같은 입자들을 빛의 속도의 20% 이내로 가속해 입자충돌을 유도하면서 핵변환을 통한 새로운 방사성 동위원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기술은 핵무기 개발의 핵심기술이 되었고 사이클로트론은 국가 간 군사경쟁에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는 장치로 인식되었다.
이런 가속기를 1937년 일본의 니시나 요시오 박사가 독자적으로 건설한 것이다. 독일은 나치의 지원으로 하이델베르그에 건설을 시작했고 일본보다 늦은 1943년에 건설을 마친다. 일본은 니시나 박사의 지휘로 세계 최대 규모의 사이클로트론 제작에 착수한다. 핵무기 개발을 위한 국가간 가속기 제작 경쟁의 시기였다. 사이클로트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핵무기 개발에 실패한다. 일본엔 우라늄이 없었다. 미국은 독일의 우라늄이 일본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했고 일본은 결국 우라늄 반입에 실패했다.
그래도 미국은 일본이 진주만공격에 이어 원자폭탄으로 미국 본토를 습격을 할까 두려워했다. 1945년 일왕의 항복 직후 맥아더 장군이 첫 번째로 한 일은 도쿄의 리켄연구소 접수였다. 리켄을 접수한 미군은 니시나가 만든 세계 최고 성능의 사이클로트론을 철거해서 도쿄만 앞바다에 버렸다. 일본 핵개발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의도였다.
일본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니시나는 1946년에 이화학연구소 소장에 취임한다. 그의 제자 중에 유가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 박사가 있었고, 그와 함께 실험장비를 만들던 제자들은 일본 과학의 중심이 된다. 1949년 유가와 히데키가 그리고 1965년엔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니시나의 유산이 일본과학자들이 노벨물리학상으로 가는 길을 닦아놓은 셈이다. 전쟁에서 패했지만, 일본은 다시 가속기의 건설을 시작하였고 결국 21세기인 지금,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방사광가속기를 가장 많이 보유한 과학기술 일등국가 반열에 올랐다
가속기 역사만 살펴보아도,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와 뛰어난 과학자의 비전이 해당 국가의 장기적인 과학기술발전 전략에 얼마나 중요한지 일본 리켄연구소의 니시나 그룹 사례가 말해주고 있다. 과학의 혁명적인 발상과 도약은, 니시나처럼 뛰어난 과학자와 그 주변의 소그룹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노벨 물리학상을 두 개나 받을 정도의 연구력과 거대연구장비를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역량이 축적되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제 한국은 과학기술 투자측면에서 보면 세계 어느 국가에도 뒤지지 않는다. 과학기술의 역사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과학기술 기반을 이루는 플랫폼은, 국가의 미래전략에 필수적이며, 장기적이고 포용적인 관점을 지닌 과학기술인의 주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우리나라도 그런 준비를 할 때다.
이주한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대형연구시설기획연구단장
[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