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폭풍 닥치는데 우물만 팔텐가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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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T현장] 폭풍 닥치는데 우물만 팔텐가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단 이틀이다. 이틀 만에 세계 반도체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한동안 잠잠했던 글로벌 반도체 인수·합병(M&A) 움직임이 다시 살아났다. 작년 기준 아날로그반도체 시장점유율 2위인 아날로그디바이스(Analog Devices·ADI)는 7위인 '맥심 인티그레이티드 프로덕츠'를 210억 달러(약 25조원)에 인수하겠다고 13일(현지시각) 공식 발표했다.

아날로그반도체란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빛과 소리, 압력, 온도 등의 아날로그 신호를 컴퓨터가 인식할 수 있도록 디지털 신호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그 반대로 디지털 신호를 사람이 인지할 수 있도록 아날로그 신호로 바꿔주는 역할도 한다. 아날로그반도체는 사물인터넷 시대를 맞아 주목받는 대표적인 시스템반도체 시장 중 하나로 꼽힌다. 센서를 기반으로 한 자율주행이나 체온·맥박 측정 등 원격진료의 경우 아날로그반도체가 필수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시장은 사실상 미국과 독일 등 일부 국가들이 장악하고 있다. 이번 합병이 성사되면 AD는 지난해까지 50억 달러 가량 차이가 났던 1위 텍사스인스투르먼트와의 격차를 30억 달러 안팎으로 줄일 수 있다. 여기에 통신·디지털의료 등에 강점이 있는 ADI와 자동차용 시장에서 존재감이 큰 맥심과의 시너지도 기대할 수 있다. 아날로그반도체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역성장할 전망이지만, 그 전까지는 주요 반도체 제품 가운데 가장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갈 시장으로 꼽혔다.

하지만 이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업체의 이름은 톱10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도체 코리아'에 더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소식도 전해졌다.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의 위협으로 소프트뱅크가 ARM을 애플 등에 매각할 수 있다는 일부 보도가 나온 것이다.

영국의 반도체 설계자산(IP) 업체인 ARM의 경우 삼성전자가 자체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인 엑시노스는 물론 비메모리 핵심 사업으로 육성 중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영역에서도 긴밀한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만약 애플이 이 업체를 인수한다면,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경쟁사인 애플에 IP사용료를 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지속적인 협력도 쉽지 않을 것으로 우려된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가 소프트뱅크의 '백기사'로 나설 가능성도 점쳐지지만, 현재 시점에서 가능성은 제로다. 수십 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M&A를 추진할 수 있는 결정권자는 삼성전자에서 이재용 부회장 뿐인데, 현재 이 부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발목이 잡혀 꼼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장이 열리면 초기에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번 기세를 타기 시작하면 압도적인 '원톱'과 기타 등등으로 나뉘는 것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자동차용 시스템반도체나 바이오,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등에서 유독 많은 합종연횡이 일어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글로벌 반도체 M&A 시장에서 삼성을 비롯한 국내 주요 대기업들의 존재감은 거의 0에 가깝다. 지난해만 봐도 인텔이 스마트폰용 모뎀 사업을 약 10억 달러에 애플에 매각하기로 했고, 미국 마벨(Marvell)이 무선랜 사업을 네덜란드 NXP반도체에 매각하는 등 활발한 M&A가 이뤄졌다.

이게 바로 이 부회장이 "위기"라고 말하는 이유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는데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에 대한 사법 리스크로 인해 3년 넘게 M&A 시장에 뛰어들 수 없는 처지다. 전문경영인이 불확실성을 감수하면서 조 단위의 투자를 결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외신이 보는 시각도 같았다. 미국 월스트리저널(WSJ)도 최근 보도에서 "지난 3년간 이 부회장의 법적 문제로 회사는 거의 마비 상태에 놓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면서 "신성장 분야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 부재했다"고 지적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이 바뀌고 있다. 경제는 위태롭다. 그럼에도 죄가 있다면 벌을 받아야 하는 사회정의는 실천해야 한다. 다만 이 부회장에 대한 최근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의혹 제기'는 '역차별'이라 할 정도로 가혹하다. 최소한 '법 앞의 평등'은 구현해달라는 요청은 할 수 있다. 이 부회장에게 죄가 있다면 이를 증명할 시간은 충분하고, 그렇다면 이 부회장 말대로 일단 경제를 살릴 '기회'를 줬으면 싶다.

박정일기자 comja7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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