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확장재정의 희생양` 과학기술

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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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T현장] `확장재정의 희생양` 과학기술
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몇 년 전만 해도 분기별로 정부출연금을 또박또박 받았는데, 입금 주기가 월별로 바뀌더니 최근에는 매월 입금되는 것 조차 제 날짜에 들어오지 않고 들쑥날쑥이네요." 모 정부출연연구기관 예산 담당자는 "나라에 정말 돈이 없구나"라는 것을 국가예산(정부출연금)이 들어오는 통장의 입금 내역을 보며 실감하고 있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예산 담당자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내년 걱정이 앞선다. 올해는 어떻게든 부족한 예산을 어찌어찌 메울 수 있겠지만, 가뜩이나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국가재정 상황을 감안할 때, 정부를 상대로 예산 작업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내년 예산안이 오는 9월 국회로 넘어가기까지 출연연 기관장과 예산 담당자들은 이른바 '돈줄'을 쥐고 있는 기획재정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부처 공무원을 찾아가 더 많은 예산을 받기 위해 읍소해야 하는 처지다. 또한 새롭게 개원하는 21대 국회를 상대로 예산 설득 작업에도 나서야 하는 등 세밑까지 한바탕 '예산 전쟁'을 치러야 할 판이다.

이처럼 정부의 무리한 확장재정의 영향으로 나라 곳간이 점점 비어가는 '현대판 보릿고개' 속에서 과학기술계의 시름이 한층 깊어지고 있다. 과학기술계는 과학기술 특성상 예산을 투입한다고 해도 당장 눈에 보이는 아웃 풋(성과)을 낼 수 없기에 정부 예산 심의나 배정 과정에서 긴급성을 요하는 예산에 밀리기 일쑤다.

물론 아직 국가 재정건전성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어서 걱정할 단계라고 정부는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장기화에 따른 경기 침체, 고용 불안 등에 최근 남·북한 위기 조짐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사그라 들지 않으면서 앞으로 국가 재정 수요는 지금보다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정부 차원에서 경제위기 극복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응한 '한국판 뉴딜'을 위해 보다 과감한 재정확장을 추진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과학기술 관련 예산은 현재로선 더더욱 후순위로 밀려날 가능성이 클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정부는 3차 추경 재원 확보를 위해 25개 정부출연 연구기관에 지원한 정부출연금 660억원을 강제적으로 거둬가는 '웃픈'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출연연 간 융합연구를 통해 국가·사회 현안과 신산업 창출을 위해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추진하고 있는 대표 사업인 '융합연구단' 관련 예산도 전체(404억원)의 17%인 68억원을 자진 반납하기도 했다.

정부출연금은 말 그대로 정부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아 각 기관이 한 해 동안 주요 연구개발사업과 인건비, 경상비, 시설비 등에 지출한다. 올해 국가가 정부출연금 명목으로 25개 출연연에 지원하는 예산은 대략 4조원에 이른다. 이 예산에는 정부출연금 2조원, 정부수탁 등을 통한 자체수입 2조원이 포함돼 있다. 올해 국가 전체의 R&D 예산이 24조원임을 감안할 때 16% 가량이 출연연의 정부출연금으로 쓰이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에 돈이 모자라다 보니 정부가 주는 정부출연금 지급 시기가 매번 들쑥날쑥이다. 반기별로 지급되던 것이 분기별로 바뀌더니, 몇 년 전부턴 월별로 주기가 더 짧아졌다. 심지어 지난해부터는 정해진 날짜에 정부출연금이 입금되지 않고, 예정된 지급액이 며칠에 걸쳐 나눠서 지원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3개월 동안 25개 출연연이 지급받지 못한 정부출연금만 3172억원에 이르고 있다. 기관별로 적게는 90억원에서, 많게는 300억원까지 받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최근 이 중 980억원 가량이 지급돼 다소 숨통을 텄지만, 언제든 이런 일이 반복될 여지가 높다.

이렇다 보니 연구현장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일부 기관의 경우 연구과제 계약 체결과 연구비 집행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급한 곳이 아니면 신규 지출을 아예 막은 곳도 있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정부출연금을 충당해야 할 처지까지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섞인 목소리도 불거져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과학기술 분야 혁신 전략으로 '사람 중심의 과학기술정책'을 펴겠다고 제시했다. 이를 위해 연구자 주도의 기초연구를 확대하고, 도전적인 창의적인 연구환경을 만들겠다고도 했다. 작금의 상황을 보면 이런 말들이 '공염불'에 지나지 않나 싶다. 과학기술은 한 나라의 미래에 대한 투자다. 이 때문에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투자가 뒷받침될 때 과학기술의 미래가 있다. 전 국민이 염원하는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 개발도 정부의 꾸준한 지원과 과학기술인의 땀과 노력이 더해질 때 가능한 일이다.

'K-방역' 모범국가로 전 세계에 국격을 높이고 있는 우리나라가 'K-사이언스'로 도약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더욱 필요한 때다. 과학기술인 역시 24조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국민의 세금을 받아 연구를 하고 있는 만큼 이에 걸맞는 성과로 보답해야 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준기 기자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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