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음악으로 만난 어린왕자·고흐… 소치의 겨울은 뜨거웠네

2008년 첫 페스티벌… 올해로 13년
소치의 문화도시 성장에 사다리 역할
인기 갈수록 높아지며 인구유입 효과도
젊고 유능한 예술가 발탁 기회의 장
"미래 음악계 가늠자… 다음이 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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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3-26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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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 음악으로 만난 어린왕자·고흐… 소치의 겨울은 뜨거웠네
네 별을 떠나지마

[객석] 음악으로 만난 어린왕자·고흐… 소치의 겨울은 뜨거웠네
반 고흐.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

[객석] 음악으로 만난 어린왕자·고흐… 소치의 겨울은 뜨거웠네
오프닝 갈라 콘서트


월간 객석과 함께하는 문화마당

소치 겨울예술축제를 찾아서


앞으로는 흑해, 뒤로는 캅카스산맥과 맞닿은 도시. 소치의 여름은 뜨겁고, 겨울은 따뜻하다. 덕분에 소치는 러시아 대표적 휴양지로 자리매김했다. 무엇보다 스탈린이 즐겨 찾던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스탈린 통치 기간 때 소치에는 고전 건축물이 들어섰다.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한 소치. 소치겨울예술축제가 열리는 겨울극장(Zimniy Teatr)도 스탈린 시기에 지어진 공연장이다.

◇지역과 함께 성장한 예술축제

제13회 소치겨울예술축제(2.12~23)가 개최됐다. 2008년 첫 문을 연 페스티벌은 소치가 러시아 문화 도시로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는 비올리스트로 잘 알려진 유리 바시메트(1953~)가 첫 시작부터 지금까지 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소치의 눈부신 자연 풍경을 사랑한 바시메트. 그는 소치를 대표하는 음악 페스티벌을 꿈꿨다. 당시 소치는 휴양지라는 인식이 강했기에, 그곳에 페스티벌을 유치하려는 바시메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회의적이었다.

세 개의 공연으로 소담하게 시작한 소치겨울예술축제가 어느덧 13년을 맞았다. 그동안 소치에서는 2014년 동계올림픽과 2018년 피파 월드컵이 열렸다. 러시아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도시가 된 소치. 그래서인지 최근 몇 년간 인구가 증가했고, 축제의 인기는 해를 거듭할수록 높아졌다.

올해 특이점은 개막 전에 모스크바 오프닝 주간(1.24~2.10)을 가져 '유리 바시메트 페스티벌 오브 아트 인 모스크바'라는 명칭으로 모스크바 공연이 열렸다. 러시아 중심지의 관객을 소치로 이끌기 위한 전략으로 읽혔다. 기자는 2월 10일에 열린 모스크바 폐막 공연을 보기 위해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유리 바시메트와 인큐베이팅

모스크바의 추위는 대단했다. 한국의 겨울이 유독 따뜻했기에 북풍을 맞으니 도리어 시원한 기분이었다. 폐막 공연은 모스크바 음악원 그랜드홀에서 열렸다. 이날 공연은 '시간-앞으로(Time-Forward)'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클라우디오 반델리의 지휘, 2018년에 내한한 러시아 국립 청소년 교향악단(Youth Symphony Orchestra of Russia)이 연주를 맡았다. 이들은 살아있는 다섯 작곡가 발레리 보로노프(1970~), 쿠즈마 보드로프(1980~), 알렉세이 슈마크(1976~), 아츠히코 곤다이(1965~), 알렉산드르 차이콥스키(1946~)의 작품을 연주했다. 특히 1부를 장식한 발레리 보로노프의 '타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헬리오스', 쿠즈마 보드로프의 '미라지(Mirage)'는 세계 초연이었다. 다섯 명의 작곡가는 모두 무대에 올라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바시메트는 무대에 선 작곡가들에게 애정의 마음을 전했다. 무대에 선 작곡가들 역시 바시메트를 믿음직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대규모 페스티벌의 폐막 공연을 동시대 작품으로 채운 점은 퍽 인상 깊다. 아울러 실험적인 음향의 곡들을 연주하는 청소년 교향악단의 실력은 놀라웠다. 연주를 기획한 바시메트의 깊은 혜안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비올라의 선구자 역할을 해온 바시메트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는 비올라 발전을 위해 현대 작곡가들과 면밀히 소통하며 비올라 레퍼토리를 넓히지 않았는가. 그의 진보적인 발걸음은 소치겨울예술축제 운영에 있어서도 유연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접하며 성장하는 러시아의 청소년 음악가들은 한국에 귀감이 될 만했다.

◇죽음과의 사투를 보여준 두 음악극

두 시간 정도를 비행해 소치에 도착했다. 소치의 날씨는 모스크바에 비해 온화했다. 대개 소치를 '한국의 평창'으로 비유하던데, 제주도에 더 가까웠다. 살가운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야자수, 빛이 닿아 반짝이는 흑해를 응시하며 겨울극장으로 향했다.

12일, 소치겨울예술축제 공식 개막작이 올랐다. 이 페스티벌에서 2016년에 초연한 음악극 '네 별을 떠나지마(Don't leave your planet)'가 개막 작품으로 선정됐다.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빅토르 크라머가 연출, 쿠즈마 보드로프가 작곡을 맡았다. 이 작품은 네 명의 영상디자이너 참여했을 정도로 생동하는 영상미가 돋보였다. 러시아 국민배우 콘스탄틴 하벤스키가 밀도 있게 극을 끌고 갔다. 유리 바시메트가 이끄는 모스크바 솔로이스츠는 무대 위에서 음악을 연주하기도, 함께 연기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어린 왕자'를 단순히 러시아어로 번역한 작품은 아니었다. 이름 모를 행성에 불시착한 조종사를 어른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원작에 담긴 환상성은 극 안에 가득 찼다. 이 환상성은 시각적·음악적으로 구현돼 관객에게 몽환적인 감성을 선사했다. '죽음이 도처에 가득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영혼'이라는, 어린아이 같은 말투로 어린 왕자는 어른의 생각을 전했다. 원작을 뒤틀면서도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명료히 전달됐다.

이어서 15일에 초연한 '반 고흐.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Van Gogh. Letters to His Brother)'도 흥미로운 음악극이었다. 체호프 모스크바 아트 시어터의 감독 마리나 브루스니키나가 연출을 맡았고, 배우 예브게니 미로노프가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도 바시메트와 모스크바 솔로이스츠가 함께했다. 반 고흐가 그의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미로노프는 덤덤히 읊었다. 타인에게 보내는 편지이지만, 사실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죽음을 예견한 고흐의 넘실거리는 감정이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초연하게 다가왔다. 미로노프는 "고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고 싶어서 무언가를 남기려고 애쓴 듯하다"고 말했다. 나를 유일하게 지지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만큼 진솔한 것이 있을까. 배우의 감정이 변할 때마다 무대에 투사된 고흐의 그림이 함께 움직였다. 무대를 가득 채운 고흐의 작품에는 특유의 색채감이 선명히 묘사됐다.

◇폭넓은 레퍼토리를 수용하다

13일에는 '오프닝 갈라 콘서트'가 열렸다. 1부는 모스크바 솔로이스츠, 2부는 바시메트가 최근 몇 년간 애정으로 이끌고 있는 러시아 국립 청소년 교향악단이 올랐다. 모스크바에서의 폐막 공연과 마찬가지로 현대 작곡가들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동시대 작곡가 마이클 니만(1944~)과 쿠즈마 보드로프(1980~)의 곡이 무대에 올랐다. 더불어 바흐·생상스·쇼송·차이콥스키·쇼스타코비치 작품이 함께 배치돼, 서양 음악사를 한 흐름에 살필 수 있었다. 특히 쿠즈마 보드로프가 작곡한 '차이니스 보이스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소품'은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동양의 음악 어법, 창법에 관한 서양 작곡가의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마지막 무대는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이 장식했다. 그는 쇼송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 생상스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 op.28을 연주했다. 담백하면서도 깊이 있는 음색이 특징인 그의 연주를 오랜만에 들으니 반가웠다. 클라라 주미 강은 함께 호흡을 맞춘 청소년 교향악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리허설을 할 때 원하는 부분을 말하면 이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했어요. 실력이 뛰어나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어릴 때 사라 장을 보며 꿈을 키웠어요. 청소년 시기, 위대한 연주자들과 가까이에서 영감을 주고받는 경험은 나중에 큰 힘이 될 거예요."(클라라 주미 강)

월드뮤직을 향한 페스티벌의 관심은 14일 공연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소나 자바테가 이끄는 앙상블이 에스닉 콘서트(Ethnic Concert)를 선보였다. 소나 자바테는 아프리카 서쪽 지역의 전통 악기인 코라(Kora)를 능숙히 다루며 노래했다. 21현의 코라는 아프리카에서 보통 남자들에 의해 앉아서 연주된다고 한다. 소나 자바테는 코라를 들고 남성 멤버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기량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러한 모습만으로도 아프리카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객석을 채운 러시아 관객은 그와 함께 손뼉 치고, 노래하고, 리듬을 타며 무대를 오롯이 즐겼다.

소치에서의 마지막 밤(2.16)에는 아서 피타가 안무한 '더 마더(The Mother)'를 봤다. 아동문학 대가 안데르센의 어머니를 소재로 삼았다. 작품은 죽음을 낭만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시종일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끌고 가며, 동화에서 나오는 행복한 결말은 없다. 무용수 나탈리 오시포바는 역동적인 힘으로 작품에 몰입했다. 가엾고 작은 생명체를 바라보는 희생적인 어머니의 사랑, 그 심오한 감정을 풀어내는 오시포바의 움직임. 감정이 미묘하게 변할 때마다 무대 양쪽에 위치한 연주자 프랭크 문과 데이비드 프라이스는 관객에게 짜릿한 음악적 전율을 선사했다.

◇다음 세대를 위한 발걸음

이외에도 다양한 부대행사가 열렸다. 대부분의 행사는 젊은 예술가에게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15일에는 작곡가 마스터클래스를 참관했다. 작곡 전공생들은 일곱 명의 작곡가에게 자신의 작품을 들려준 후 자유롭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작곡가 오스카 비안치, 알렉산드르 차이콥스키, 발레리 보로노프, 쿠즈마 보드로프, 알렉세이 슈마크, 크쥐시토프 메이어, 파트릭 데 클레르크는 학생들과 함께 수평적인 분위기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했다. 악기의 편성, 가사와 음의 조화, 주제의 접근 등 현대음악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오갔다. 오스카 비안치는 "현대 작품에서도 스토리에 대한 부분이 연주자와 공유가 돼야 한다. 음향적으로 늘어놓기만 한다면 그건 그냥 보여주기 식 음악"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15일 다른 세션에서는 '젊은 음악 경영자를 양성해야 하는 이유' '젊은 관객을 극장으로 흡수하기 위한 방안'에 대한 콘퍼런스가 네 시간 동안 열렸다. 콘퍼런스에 참여한 박준식 대표(제이삭 뉴욕)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젊은 음악 경영자를 개발하는 일은 모든 나라에서 필요해요. 어느 음악계에나 관객 개발을 위해 애를 쓰는데, 가장 중요한 건 필드에서 이를 이끄는 매니저가 양성되어야지 지금의 감각에 맞는 공연을 만들 수 있겠죠."

흥미로운 점은 국제적인 음악 경영인이 되기 위해서는 '음악에 관한 기초 지식이 필요한지'에 대한 토론이었다. 이를 두고 클래식 음악매니지먼트 아스코나스 홀트의 게탕 르 디브리는 "아스코나스 홀트에서도 법학이나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이 많습니다. 예술경영은 현장에서 배우는 일이기에 음악적 교육이 필수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의견을 더했다. 소치겨울예술축제에서 내년에는 젊은 기획자를 초청하는 콘퍼런스를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취재를 통해 소치겨울예술축제가 짧은 시간 동안 러시아를 대표하는 페스티벌로 성장한 이유를 확인했다. 축제의 방향성은 미래 음악계로 적확히 뻗어 있었다. 그렇기에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페스티벌이다.

기획·글 = 월간객석 장혜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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