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족집게로 문화집기] 연결된 개인이 트렌드 선도한다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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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1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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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근의 족집게로 문화집기] 연결된 개인이 트렌드 선도한다
하재근 문화평론가
요즘 '강제 전성기' 현상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이 특별한 활동도 없었고, 매체에서 조명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뜨는 현상이다. 작년에 강제 전성기를 맞은 스타가 김영철이었다. 누리꾼들이 2002년 드라마 '야인시대'의 한 장면을 발견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 작품에서 김두한 역할로 나온 김영철은, 임금을 깎으려는 미군에 맞서 고집스럽고 당당하게 '4딸라!'를 외쳤다. 김두한이 굳건하게 입장을 고수하자 기가 꺾인 미군은 결국 김두한의 요구를 수용한다. 바로 이 장면에 누리꾼들이 열광한 것이다.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짧은 동영상이나 이미지를 '짤방'이라고 하는데, 누리꾼들은 김영철의 '4딸라!' 장면을 짤방으로 만들어 유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기성 대형매체의 역할은 전혀 없었다. 매체들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누리꾼들에 의해 '4딸라' 영상이 인터넷을 뒤덮었고 결국 김영철은 강제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말았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4딸라' 대사를 활용한 광고까지 찍더니 '2019 올해의 브랜드 대상' CF모델 부문 대상까지 수상했다. 한때 자유한국당이 이 인기에 주목해 김영철을 영입 대상으로 거론했다가 누리꾼들의 비판으로 유야무야됐다.

김응수도 강제 전성기를 당한 배우다. 2006년작 '타짜'에서 김응수가 연기한 조폭 곽철용을 누리꾼들이 발견한 것이다. 정작 개봉 당시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조연 캐릭터였는데 13년이 지난 2019년에 떴다. 누리꾼들은 곽철용의 모습을 짤방으로 퍼뜨렸고, 그의 대사인 "묻고 더블로 가", "젊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 "마포대교는 무너졌냐", "화란아, 나도 순정이 있다" 등을 유행어로 만들었다. 정작 최신 출연작은 별로 화제가 되지 않았는데, 누리꾼들이 만들어준 2006년작의 화제성 덕분에 김응수는 데뷔 30년 만에 화장품 광고를 찍기에 이르렀다. 모델료도 두 배 이상 뛰어올랐다.

펭수도 강제 전성기를 맞아 '직통령'에 등극했다. 원래 펭수는 EBS가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어린이 프로그램에 투입한 캐릭터였다. 그래서 펭수의 나이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시작되는 10살로 설정됐다. 하지만 2030 직장인 누리꾼들이 EBS의 의도와 상관없이 펭수를 직통령으로 만들었다. 성인들의 호응이 크자 EBS는 뒤늦게 펭수를 어린이프로그램에서 빼내 심야시간대로 편성이동하고, 성인들이 요구하는 대사와 상황들을 펭수 프로그램에 반영했다.

작년 연말엔 양준일이 강제 전성기를 당했다. 2000년대 초에 가수 생활을 그만 둔 그는 미국 레스토랑에서 서빙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리꾼들이 1990년대 양준일의 무대 영상을 발견해 열광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방송사가 미국의 양준일을 호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양준일은 한국 활동을 시작했다. 강제 전성기라는 단어가 그야말로 잘 어울리는 사례다.

누리꾼들은 방송 적폐도 시정했다. '프로듀스101' 오디션 조작을 밝혀낸 것이 바로 누리꾼들이었다. 시즌 초기부터 누리꾼들이 조작 의혹을 제기했지만 기성 언론은 무관심했다. 누리꾼들은 포기하지 않고 점점 더 치밀하게 분석을 이어가 마침내 시즌4에선 누가 봐도 조작이라고 느낄 만큼 이상한 투표 수치들을 찾아냈다. 그래서 예능프로그램 조작으로 제작진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이끌어낸 것이다. 누리꾼들이 나서지 않았으면 조작방송이라는 적폐가 그대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누리꾼들이 스스로 스타를 만들고, 문제를 시정하는 시대인 것이다. 과거엔 기성매체가 스타를 만들었다. '논스톱'의 조인성, '꽃보다 남자'의 공유, 또는 영화 '친구'의 유오성 등이다. 문제점도 기성매체가 관심을 가져야만 공론화됐다. 하지만 이제는 누리꾼들이 화제를 만들고 문제를 지적하면 기성매체가 뒤늦게 그것을 받는 흐름이 나타난다. 김영철, 김응수, 펭수, 양준일 등이 모두 그런 사례다.

인터넷의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과거 고립된 개인들은 매스미디어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트렌드를 추종할 뿐이었다. 그 개인들이 인터넷, SNS로 그물망처럼 연결되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다중이 되었다. 이젠 매스미디어가 개인들의 뒤를 좇는 역주행이 나타난다. 지금 시점은 인터넷 개인들의 힘이 기성 매체의 힘과 동등해지기 시작한 분기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IT 기술이 발달하고, 넷활동이 익숙한 세대가 사회 주류가 되면서 '연결된 개인'들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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