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의 니하오 차이나] `중국의 이순신` 항왜명장 척계광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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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서의 니하오 차이나] `중국의 이순신` 항왜명장 척계광
16세기 명나라는 왜구의 피해를 극심하게 겪었다. 비단과 도자기의 최대 산지였던 저장(浙江)성이 가장 큰 피해지역이었다. 왜구의 전성기는 1522년 명나라 가정제(嘉靖帝)가 즉위한 이후 약 40년 간이었다. 무려 600여 차례의 왜구 준동이 있었다. 이 때가 가정제 통치 시기였기 때문에 이들을 '가정 왜구'(嘉靖倭寇)라고 부른다.

이 시기 왜구가 발흥하게된 데는 감합무역(勘合貿易)의 중단 영향이 컸다. 감합무역이란 일종의 조공무역을 말한다. 당시 명과 일본 간 무역은 명 조정의 공인을 상징하는 감합부(勘合符, 무역선이 소지한 일종의 표찰)를 통해 조공 형태로 행해졌다. 그때 일본에선 오우치(大內) 가문과 호소카와(細川) 가문이 감합무역을 독과점 형태로 장악하고 있었다. 가정제 즉위 이듬해인 1523년 이 두 가문이 각각 파견한 조공 사절이 저장성 닝보(寧波)에서 충돌해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관리들이 죽었다. '닝보의 난'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명나라 조정은 분노했고 이를 기점으로 감합무역은 폐지된다. 공식 무역이 중단되자 밀무역이 급증했고 이를 틈타 왜구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이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왜구는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왜구는 잔학한 행위로 악명을 떨쳤다. 임산부의 배를 갈라 뱃 속 아기가 아들인지 딸인지를 맞히는 도박게임을 왜구들이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 조정은 왜구들을 섬멸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일본도를 능수능란하게 휘두르는 왜구를 이겨내지 못했다. 직업적 전사가 대부분이었던 왜구들은 징집된 농민병으로 구성된 명나라 군대를 압도했다.

[박영서의 니하오 차이나] `중국의 이순신` 항왜명장 척계광


이런 상황에서 민족영웅이 등장했다. 바로 항왜(抗倭) 명장 척계광(戚繼光)이다. 1555년 저장성에 부임한 척계광은 농부와 광부 3000여명을 모아 의용군을 만들었다. 척계광은 접전 상황과 왜구의 검법을 연구해 '원앙진'(鴛鴦陣)이라는 독특한 분업형 전투편제를 창설했다. 12명으로 구성된 분대를 만들고 이들의 임무와 기능을 세분화했다. 방패·낭선(사슴뿔 형태의 쇠로 만든 가지가 달린 대나무)·창·당파(삼지창) 담당으로 분업화된 병사들은 한 팀으로 뭉쳐 적에게 시간차 공격을 가했다.

이런 편제와 전법은 중국에서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발상이었다.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버리고 혁신을 추구한 원앙진은 명나라 군대의 효율성을 크게 높였다. 원앙진을 기반으로 척계광 군대는 갈수록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 5년여 간 왜구 소탕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 왜구는 척계광의 활약에 의해 1567년의 전투를 마지막으로 소탕된 것으로 간주된다. 척계광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에 병법서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집필했다. 이 책은 임진왜란때 조선에 전해졌다.

명나라 11대 황제 가정제 시기는 내우외환으로 가득찬 때였다. 엄숭이란 간신이 조정을 장악해 내정이 문란했고 밖에서는 왜구들이 몰려들어와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다. 이런 난세에 척계광이 등장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숱하게 왜구의 침입을 받아온 나라다.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이 있다면 중국에는 척계광이 있다. 일본의 경제보복에다 미중 환율전쟁까지 겹치면서 안팎으로 위기의 시국이다.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영웅이 나타나 민초들에게 희망을 주기를 기원해본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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