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외친 먹물들, 국민 감정은 무시… 추상적 지식은 헛것" [이인호 前 KBS 이사장에게 고견을 듣는다]

'촛불'… 혁명 미화한 것부터가 잘못,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뒤집어
추상적인 배움은 경험으로 배운 지혜만 못해, 그래서 지식인들이 죄가 많아
극에 달한 진영 대결… 반공 이념 더욱 공고히 해야 우리 사회 지킬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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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외친 먹물들, 국민 감정은 무시… 추상적 지식은 헛것" [이인호 前 KBS 이사장에게 고견을 듣는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前 KBS 이사장

박동욱기자 fufus@


[]에게 고견을 듣는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前 KBS 이사장




'토착왜구' '종북'이란 말폭탄이 난사되는 어지러운 시절이다. 한쪽은 상대방을 기득권 친일 반공 세력으로, 다른 쪽은 역으로 낡은 수구 이념에 찌든 친북 가짜 민족팔이 세력으로 몰아붙인다. 어느 새 중간지대는 쪼그라들어 양극단의 색깔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있다. 해방 직후 좌우익 대립이 재현되고 있다는 우려가 일고 있다.

그러나 이 대결은 의도적 회피나 모호한 공존이 불가능한 건곤일척일 수밖에 없다. 양 진영이 내세우는 슬로건은 한쪽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다른 쪽은 대놓고 외치지는 않지만 인민민주주의와 변형된 시장경제다. 심판은 전체 국민이 본다.

그 판세를 이해하기 위해, 아니 솔직히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어느 편의 손이 올라가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고견을 들었다.


대담 = 이규화 논설실장


"우리가 언어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공산주의 쪽이 워낙 선전선동에 능해 좋은 말을 선점해버렸거든요. '인민' '동무'가 그런 거예요.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고 사람들을 결집시킵니다. 그럴수록 자유민주 진영은 공부를 철저히 하고 심지를 단단히 해 뭐가 무언지를 가렸어야 하는데 그걸 못했어요.(중략) 불량배가 된 한 형제가 번득이는 칼을 쥐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부자가 돼 살고 있는 다른 형제 집에 와 담을 헐고 같이 살자고 하면 나중에 그 칼이 어디에 쓰이겠어요? 간단하거든요. 담을 지키면서 사람답게 살도록 만든 다음 담을 허물어야지, 담부터 허문다고 그게 화합이 잘 되겠습니까."

이 교수는 예의 자유민주의와 시장경제, 반공(反共)의 이념을 더욱 공공히 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결에서 반대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혁명사를 누구보다도 꿰차고 있고 공산주의자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익히 알고 있는 이 교수의 말은 마디마디 힘이 넘쳤다. 청아하면서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귀청이 시원하게 뚫리는 듯 했다. 고명한 역사학자로서 첫 한국 여성 주러시아 대사와 주핀란드 대사, KBS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체득한 통찰력과 감(感)을 통해 현 상황을 예리하게 펼쳐 보여줬다. KBS 이사장직을 작년 1월 사직한 후 두문불출 하던 이 교수는 최근 들어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에 대해 직설을 주저하지 않는다. 최근 안민정책포럼에서 그의 '볼셰비키 혁명에 비추어 본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이란 강연을 감명깊게 듣고 졸라서 댁을 찾아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한국과 일본이 여전히 '역사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한일외교 갈등이 이전에 보지 못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요.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하는 거예요. 실제 나라 살림이라는 것을 보면 국제환경에서 사는 거잖아요. 일제와 6·25 등 각종 우여곡절 끝에 이만치 살게 됐잖아요. 우리가 처음으로 국제사회에서 부러움을 사는 나라가 된 거예요. 올림픽도 세계에 보란 듯이 성공했고 한류도 온 세계가 즐기고 보는데 이게 모두 잘못된 것이고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라라고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잖아요."

-교수님 같은 원로 분들의 존재만으로도 나라의 정통과 근간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힘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저는 늘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지식인들이 제 구실을 못 한 게 이 나라가 심하게 흔들리는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이래나 저래나 다른 사람들보다 특전을 많이 누리고 산 사람들인데 그 구실을 정말 못 했습니다."

-교수님 세대에 비하면 또 그 후 세대는 더 '호화판'으로 컸고, 이후 세대로 이어지면서 그런 경향이 쭉 이어졌잖아요. 교수님 세대도 청년기 참 곡절을 많이 겪은 세대 아닙니까.

"4·19가 우리 세대의 작품이지요. 저는 공부하느라 좀 비껴나 있었지만. 4·19는 사실은 나중에 진면(眞面)이 왜곡되는데 이 세대가 강하게 저항을 안 한 거예요. 돌이켜 생각하면, 4·19라는 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정말 제대로 세워보겠다'며 부정부패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그야말로 말하자면 의거였지, 전혀 혁명이 아니거든요. 혁명이 아닌데 그게 혁명으로 둔갑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가 막 삐뚤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게 결국은 공부를 제대로 깊이 안 한 거하고 관계가 되는 거예요."

-게으르고 무지했다는 말씀인가요.

"우리가 언어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좌우갈등이 심하고 남북이 갈라지면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공산주의 쪽이 워낙 선동선전에 능한 사람들이라서 좋은 말을 선점해버렸거든요. 그래서 인민이라고 하는 말도 못 썼고, 그리고 우리 어렸을 적에는 친구라 하지 않고 동무라 그랬어요. 근데 러시아 말 따바리쉬(tоварищ)를 동무라고 북한이 번역해서 쓰니까 동무라는 말이 금기가 돼서 다 친구를 쓰게 됐어요. 그런 식으로 굉장히 좋은 말로 사람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도구를 다 뺏겨버렸거든요. 그럼 그럴수록 공부를 철저히 하고 심지를 단단히 해서 뭐가 무언지를 가렸어야 하는데 그걸 못했지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좌파 세력에 의해 이미지가 많이 훼절돼 국민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스스로 물러난 것지요. 더 이상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 깨끗이 물러났고 또 미국이 52년 전쟁 중일 때부터 쫓아내려고 했었어요. 워낙 버거운 존재니까. 또 나이가 많았기도 했고요. 이승만을 공부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인데, 56년에 한 반 하야 성명을 했더군요. 그런데 주변 세력이 이승만 대통령이 없으면 자유당이 자신이 없으니까 하야 반대 데모를 일으켜 설득을 했던가 봐요. 그런데 저도 어렸을 때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 '저 양반 이제 쉬시게 해야 할 텐데 후계자가 없어'라는 거예요. 독재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제도적으로도 독재가 아니었어요. 권위주의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데, 권위가 있었지요. 그 분의 카리스마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단 말이지요. 연륜 경륜 학벌로 보나 다 그랬으니까요. 그 분이 당시 그런 말을 한 적이 기억나요. '공명선거 하시오.' 이 말을 입에 달고 있었어요. 4·19 때도 처음 보고 받았을 때는 학생들이 다친 줄만 알았지 죽은지는 몰랐다가 나중에 알고 물러난 거예요."

-우리나라는 그래서 '국부'가 없는 나라가 돼버렸습니다.

"세계 위대한 민족 지도자로 남의 역사에서 배우잖아요. 터키같은 경우 케말 아타튀르크가 있는데, 이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 보다 후에 사람이고 독재를 했어요. 이광요 보세요. 싱가포르가 얼마나 역사적인 지도자로 만듭니까. 국민이 못나서 탁월한 지도자를 지도자로 모시지 못하고 폄하만 하는 겁니다. 해방 후 2등 신민으로 살아온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얼마나 알겠어요. 그 때는 민주주의라는 말은 별로 안 들렸고 자치, 자주독립이라는 말이 들렸어요. 그것부터 시작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급장을 뽑았어요. 자치계를 해서 우리가 스스로 결정을 했고요. 그러니까 그 때 민주주의의 초보훈련을 시작했던 거예요. 사실 말이 민주공화정이라고 하지만 그건 몇몇 선각자들이 한 거고 해방 당시는 90%가 문맹이었으니까 거기서 민주주의를 시작한 거 말이에요. 이런 것이 사실 이승만 대통령 리더십의 소산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거기서부터 차츰차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발전해 온 거니까."




-2016년 소위 '촛불혁명'이라는 대중의 분노로 정권이 바뀌는 사태가 일어났는데요, 민주주의의 발전인가요, 후퇴인가요.

"혁명의 미화라고 할까요, 거기서부터 잘못된 겁니다.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은 물론 박정희 쿠데타 이상의 역사 거꾸로 세우기예요. 그래도 문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생각을 달리 할 수도 있지 않느냐 1년여 정도 지켜봤는데 그 여유를 안 주더라고요. 반공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대한민국을 뒤엎는 작업을 삽시간에 해왔잖아요. 사실 저같이 정치를 잘 모르고 오히려 피하면서 살아왔던 사람이 물러나라 하는 데에 이름(전광훈 한기총 대표회장의 문 대통령 하야 요구를 지지하는 전직 고위 외교관 56인이 지지 성명)을 얹히는 데까지 온 겁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더 이상 가면 나라가 완전히 파괴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겁니다. 저는 단체나 조직에 이름을 안 올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라고 봐요."

-반공을 뒤집는 것은 해방 후 선조들이 선택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인데, 그 씨앗은 어디에 있었던 가요.

"원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우리가 받아들일 때 왜곡해 받아들였어요. 일제 강점기 우리 지식인들한테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가 양대 복음이었단 말이에요. 더군다나 마르크주의 선동선전이 면밀하게 작동했고 또 서방 자유체제가 히틀러를 무찌르기 위해서 동맹을 맺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상대방의 약점을 들춰내려고 하지 않았었고. 우리나라 지식인들 상당수가 소련이 내보낸 메시지, 즉 자기들과 손을 잡으면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한꺼번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거든요. 그러니 자본주의라는 것은 나쁜 거다, 어렵게 해방을 이뤘는데 왜 자본주의체제로 들어가야 하느냐는 저항이 있었던 게 사실이거든요. 소련의 선전선동에 넘어간 거지요. 그 때 사상투쟁이 치열했어요. 형제, 부부 간에도 원수가 됐고요. 당시 이상주의적인 좌파가 상당히 많았어요. 한 가지 몰랐던 것은 원래 공산주의라는 것은 민족주의와 반대되는 국제주의거든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로 하나로 뭉쳐라 했는데, 그것은 소련 공산당의 지령에 따르라는 얘기예요.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 같은 분들이 이것을 알았던 거지요."

-대한민국이 현재까지 생존하고 이만큼 번영을 이룬 것은 그 당시 선택을 잘 한 덕분이네요.

"대한민국은 항일투쟁과 반공투쟁으로 태어난 체제예요. 처음부터 적을 안팎으로 안고 태어나다보니까 지도자들이 조금씩 조금씩 살 만한 곳으로 이끌었고 사람들이 거기에 얼마나 따르느냐는 문제였던 거지요."

-촛불로 태어난 현 정부의 편향된 남북관계와 좌편향적 경제정책 등을 보면 국민들은 다시 이념적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을 맞고 있는 것 같아요.

"박정희 이후 전두환까지 높은 경제성장으로 먹고사는 문제는 사라졌어요. 87체제라는 직선제 개헌으로 민주화에 성공했고요. 민주화라는 것이 평화적으로 선거에 의해서 정권이 바뀌는 것을 말하는데, 그동안 민주화를 잘 이행해왔단 말이지요. 그런데 촛불이 이런 그간의 축적을 무너뜨린 거란 말이에요. 김대중 대통령 집권까지는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 틀 안에서 여야가 다투면서 어느 쪽이 더 진보적으로 나가느냐는 형태였는데, 그 이후부터는 정치의 형질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렇다면 반공 자유민주주의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를 계승한다고 하지만 현실인식과 이념접근 방식이 달라요, 노무현과 문재인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파병이라든가 한미FTA, 제주 해군기지 같은 나라를 위해서는 안 하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반대를 해도 해야겠구나 생각하고 했단 말이에요. 그런 과정에서 또 반대편으로부터는 탄핵 소동이 있었고요. 나는 그 때 판세가 뒤집혔다고 봐요.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올 때는 주사파들에 업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됐지요. 촛불이라는 것을 민의라고 하는데, 저는 거기에 동의 안 해요. 5000만 국민 가운데 몇 십만 나왔다 해서 그게 민심이라고 전혀 할 수 없는 거거든요."

-역사 문제는 곧 역사교육의 문제인 거 같아요. 우리 역사교육이 잘못됐다는 지적이 많은데요.

"제가 놀라운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전교조 처음 출범했을 때가 내가 러시아 대사(1998년~2000년, 그 직전 주핀란드 대사 1996~1998년)로 나가기 전이었어요. 교육문제에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저는 그냥 문자 그대로 교원연합이랄까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왜냐하면 문교정책이 잘못돼 있고 관료적이고 교육의 목표가 뭐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훌륭한 선생님들이 있어야 하고 그 역할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어요. 교사들이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한다는 데 공감했어요. 그 때 '참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움직임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사실 가서 찬조연설까지 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그런 좋은 뜻으로 하게 되면 반(反)대한민국적인 생각을 가진 소수가 들어가서 속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거예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역사교육을 왜곡시키는 작업을 시작하는 거지요. 그건 전형적인 레니니스트 수법이에요. 역사적으로 아주 발달된 정적을 죽이는 수법이에요. 정적을 죽이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스탈린 때 극치에 이르렀지요."

-그런 그들의 수법을 왜 대한민국 세력은 몰랐던 건가요.

"그런 것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어요. 4·19 이후부터 적어도 87년까지 대학들이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데모를 했잖아요. 공부를 안 했고 광주 이후에 운동권에서 쓰인 교재들은 레닌주의 사상으로부터 스탈린 때 나온 책들, 이런 것들이 소련에서조차도 너무 왜곡이 심하고 거짓이 심해서 폐기처분된 책들이었어요. 그 중 대표적인 게 1938년에 나온 짧은 공산당사라는 '공산당약사'예요. 그게 소련에서는 제1의 교재였는데, 그게 우리나라 운동권에서 읽혔어요. 그 책을 포함해 60권 가까이를 소련 공산당이 59년에 폐기처분했어요. 오죽했으면 소련 공산당이 폐기처분했겠어요. 그것을 우리 운동권에서 일본 번역판을 들여와 교재로 퍼뜨렸던 겁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해독성 있는 존재가 됐는지 알 수가 있지요."

-70·80년대 우리 청년들과 지식인들이 거기에 물들었지만 이후 그 본산인 소련은 80년대 후반 변하기 시작했잖아요.

"그러니까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구호가 나온 게 이래서는 안 되겠다, 지금까지는 가짜였으니까 진짜 사회주의를 이제부터 해야겠다 해서 나온 게 페레스트로이카거든요.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말은 완전히 새로 짓자, 재건축을 하자는 거거든요. 데모크라티짜자라는 게 민주화라는 것이 그동안 민주주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자인한 것이거든요. 글라스노스트라는 것은 목소리를 낸다는 뜻이에요. 언론의 자유. 그때까지는 그런 게 없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 주사파들은 소련에서 없애려고 했던 것을 그대로 받아가지고 그게 설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러고 보면 주사파들은 반동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자기들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소위 수정주의 역사관인가요?

"반동도 그런 반동이 없는 거예요. 사실은 제가 서울대학교 사학과에 입학을 했다가 중간에 미국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귀국한 게 1972년 유신 선포되기 한 달 전이었어요. 유신체제라는 게 일본의 군국주의를 바탕으로 반공체제를 구축하겠다고 한 거거든요. 반미적인 요소도 상당히 들어가 있던 그런 체제였고요. 그래서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해서 서양의 민주주의도 배우려 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었어요. 그래서 유신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민족주의는 받아들여지고 친체제적 반공민주주의가 아니고 반체제적 민주주의로 왜곡돼버렸어요. 그러니까 종족주의로 막 변모가 됐지요. 공산주의라는 게 본래 국제 이데올로기인데 묘하게 대한민국에서는 부정적인 것만 들어온 거예요."

-참교육을 내세운 전교조 교사들로부터 역사교육을 받은 세대가 지금 30·40대입니다. 그들의 사고에서 반대한민국 사상이 주입됐다고 볼 수 있나요.

"근본적인 인간에 대한 인본교육의 바탕이 약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봐요. 이승만 박사 세대, 그 분이 1875년 생이거든요. 그 다음 세대, 이병철 정주영 세대만 해도 유교적인 뿌리들이 살아있었어요. 그게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될 기본, 어떤 종교나 사상에도 그게 다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사람답게 행동한다는 것이 있지 않나요. 이런 바탕 위에서 민주주의가 들어가야지 그 바탕이 없는 데에 어떤 제도가 들어가도 항상 변질될 수가 있어요. 톨스토이가 소설가로서 19세기 대예언자였는데, 러시아혁명이 움틀 때 도덕혁명을 얘기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해 매우 우려를 표했어요. 톨스토이는 '그 근거가 민주주의가 되면 사람들이 다 해방이 되고 생산도 증가하고 그런 면이 있다, 그런데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권력이라는 하는 속성은 인간을 부패시킨다, 군주제에서는 군주만 권력 맛을 알지 일반 국민은 가족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몰두하다보니 도덕적으로 부패할 여지가 없다' 그랬어요. 부패라는 게 남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는 것을 말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민주주의가 되면 권력을 조금씩 나눠가지니까 인간 모두가 권력을 악용할 유혹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어요.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큰 권력은 큰 권력대로 부패하고 작은 권력은 작은 권력대로 부패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격체로서 인간의 기본이 바로서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무너지고 나면 민주주의라는 것은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가 있어요."

-민주주의에 가시와 함정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오히려 유교 같은 권위주의는 군신유의 부자유친 등 권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도인이 되면 다른 사람들도 살기가 편한 사회예요. 다만 그 사람들이 잘못되면 이게 걷잡을 수 없게 되지만은요. 민주주의는 모두가 다 책임을 지고 경계하고 해야 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거죠. 그러니 정서교육, 도의교육이라는 게 강해져서 추상성에 함몰되지 말아야 해요. 그런데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구호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취해 가지고 실제 일어나는 효과라는 것은 본래 그들이 내세웠던 목적과는 반대로 간다는 것을 감지 못하는 거예요."

-흔히 '손에 잡히는' 실용을 얘기하는데, 지식인들이 추상성 함정에 빠져 등잔 밑 현실을 모르거나 외면하는 건 아닌지요.

"박정희 장군이 좋은 예라고 보는데요. 권력을 잡아가지고 책임을 지고 일을 할 때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잘하고 잘못하는가 하는 것이 나타나잖아요. 그러면 거기에서 일종의 타협이 이뤄져요. 재미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 자기가 한 일을 잘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나 같은 군인이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된다,' 나라가 비상상태니까 내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혁명공약이라는 것을 내세웠는데, 실제 그것을 거의 다 지켰거든요. 안보와 경제 성장, 반공 등 그게 또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식인들이 할 말이 없어지는 거예요."

-실제와 실용이 뒷받침되지 않는 개념은 공허하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렇지요. 저도 지식인으로서 큰 반성을 한 계기가 1980년대 말인가 동아일보에서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현대사에 공헌을 한 지도자들 100명을 선정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제가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박정희가 1위로 나오더라고요. 그때 지식인들은 다 박정희 반대하고 있었을 때였거든요. 근데 국민여론조사에 박정희가 넘버원으로 나와서 어떻게 세상이 이럴 수가 있느냐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박정희 욕을 한 것은 지식인들이지, 일반 서민들은 박정희 때문에 자기 삶이 나아진 것을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먹물들이 저희들 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아래 국민들의 감정이나 뜻을 모르고 무시하고 이런 짓을 했구나.' 그때 저는 겸허하게 반성을 했어요. 일반 사람들은 역시 구체적으로 삶을 중심으로 사리를 판단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늘 지식인들이 죄가 많다고 하는 이유는 지식인들이 추상적으로 배운 것은 경험으로 배운 지혜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체험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제한돼 있으니까 책이라든가 다른 매체를 통해 시대를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해 알아가는 건데, 그러나 구체적인 것을 모르고 추상적인 것만 알면 이게 완전히 헛것이고 안다고 해도 모르는 것만 못하다는 거예요."

-공직을 맡게 된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사실 저는 정치에는 늘 거리를 두고 살았고 그냥 지식인으로 내가 아는 것만큼 얘기할 건 얘기한다는 주의로 살았거든요. 소련과 수교가 임박했을 때 김영삼 김대중 야권 지도자들이 북방 분야에 관심을 많이 가졌어요. 모스크바대 총장을 초청한다고 하면 제가 전공을 했으니까 당연히 가는데, 그 때 80년대 말 90년대만 해도 소위 잘 나간다는 지식인들은 그 동네에 안 왔어요. 그러니까 내가 그쪽 눈에 띈 것 같아요. 그게 인연이 돼서 나중에 러시아 대사까지 가게 된 것 같아요. 실제 공직을 시작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였어요. 양 정부에서 핀란드 대사와 러시아 대사를 거쳐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등을 맡게 됐어요. 그러다 KBS 이사장은 나중의 일이지요."

-정권이 바뀌는 혼란기에 KBS 이사장을 하셔서 곤란한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저는 KBS이사장직 임기를 꼭 채우겠다고 다짐했어요, 결국 몇 개월 남겨놓고 사직했지만. 나마저 떨어져 나가면 안 된다 생각했고 보루가 되려고 했어요. 저는 그 전에는 언론이 저한테 참 친절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KBS 이사장으로 이름이 거론되자 한겨레가 막 나를 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아 뭔가 기류가 달라졌구나 느꼈어요. 그 때 저는 이제 나이도 많고 해서 책이나 읽고 조용히 지내자고 했었거든요. 방송도 잘 모르고. 전에 KBS 이사를 한 적이 있어서 그 쪽이 시끄러운 걸 알거든요."

-그런데도 이사장직을 수락한 이유는 무언가요.

"그 때 세월호 사고로 시끄러울 때였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그때 사람들 역사지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아니까 방송에 영향을 미쳐서교육 교양용으로 (역사교육 방송프로그램을) 활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제가 핀란드 대사를 할 때 특히 느꼈거든요. 그 사람들이 영어를 참 잘해요. 그들에게 물어보면 TV를 활용한다고 해요. 웬만한 방송은 원어로 내보내면서 자막을 넣어서 어렸을 적부터 귀로 듣고 배우는 거예요. 원어민 교사다 해외연수다 이런 거 안 하고 자기들 안에서 TV를 교육용으로 아주 잘 활용하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좋은 역사교육프로그램을 TV에서 방송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 희망을 어느 정도 갖고 이사장을 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가보니까 이건 완전히 국회 같이 싸움판이 되가지고 전혀 방송의 역할을 못하는 지경이 돼있더라고요. 그리고 부당하게 인신공격하는 풍토가 있고요. 김대중 대통령 시절 같이 공직을 지내고 친했던 사람들로부터 속 얘기를 들으면 자기들도 어떻게 할 줄 모르겠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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