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통일 이전에 東西갈등 해결 우선… 진보·보수, 서로 끌어안아야" [김홍신 前국회의원에게 고견을 듣는다]

내가 인정받으려면 남을 먼저 인정… 진영 간 50% 정도 이해하면 공존의 길 열려
어느 정권도 비판 피하려 하면 안돼, 원칙 단 1% 벗어나도 전부 안 지킨 것과 같아
민족의 문제, 옳고 그름의 개념 아냐… 자존심의 문제로 접근해야 존중받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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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통일 이전에 東西갈등 해결 우선… 진보·보수, 서로 끌어안아야" [김홍신 前국회의원에게 고견을 듣는다]
김홍신 前국회의원·작가

박동욱기자 fufus@


[]에게 고견을 듣는다

김홍신 前국회의원·작가




"진보·보수 갈등은 해결이 안 돼요. 조절을 해야 합니다. 조화가 이뤄져야 해요. 내가 존재하려면 너도 존재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인정 받으려면 먼저 남을 인정해야 합니다. 100% 이해하라는 게 아니예요. 50% 정도만 이해해도 공존의 길이 열립니다.(중략) 정치인들은 원칙을 100% 지켜야 합니다. 1%만 안 지켜도 문제가 생깁니다. 99%를 지켜도 그건 다 안 지킨 것과 같습니다. 어느 정권이든 비판을 피해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비판을 수용하며 고쳐나갸야 해요. 그러기 위해 언론, 시민사회, 네티즌 활동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밀리언셀러 작가이자 시민운동가요 남다른 의정활동으로 시선을 한몸에 받았던 김홍신 작가를 만났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국회에서 조근조근 논리를 펴던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로비를 받게 되면 그 즉시 공개하고 소신을 지키지 못할 때는 언제든 의원직을 사퇴하겠다고 했던 그였고 또 그는 그것을 실천했다. 불세출의 작품 '인간시장'은 엄혹했던 1980년대 전반 신랄한 펜날로 권력과 금력을 희롱했다. 어떤이는 현대판 홍길동 '장총찬'이 재등장해 작금의 꼬일대로 꼬인 대한민국을 쾌도난마했으면 하는 바람을 얘기하기도 한다. 아닌게 아니라 곧 장총찬을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다. '인간시장'2부를 머릿 속에서는 이미 쓰고 있다고 한다.

대담 = 이규화 논설실장

지난 달에는 충남 논산에 '김홍신문학관'을 개관했다. 집필과 강연, 시민단체 활동, 약간의 공적활동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문학관에서 문학청년들과 소통하는 또 하나의 업무가 지워졌다. 그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현실과 인터넷 콘텐츠 홍수 시대에 소설의 위기를 말하지만 놀라운 가능성을 가진 후진들이 자라고 있다"며 "한국문학은 토대(정치 경제 사회 교육 제반 환경)만 받쳐주면 세계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지위를 확보할 것"이라고 했다. '인간시장'과 대(對)를 이뤄 대하소설의 진수를 보여준 '대발해'를 집필하면서 체험한 이야기는 '창작의 고통'이 얼마나 심원한 것인지 들려준다.

소설가, 시민운동가, 정치인으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걸어온 김홍신 전 의원에게 문학인생, 정치입문과정, 현 정치세태와 진영간 갈등, 통일로 향하는 길과 개인의 행복에 대해 물었다. 인터뷰는 작가가 전남 순천에서 막 강연을 하고 올라온 지난달 30일 용산역 근처에서 가졌다. 여름 오후 햇빛이 호텔 정원에서 안쪽을 비스듬히 비출 때 시작해 3시간 여 진행됐다.

-김홍신문학관을 최근 개관했지요.

"예, 제 40여년 문학 인생을 보여주는 육필원고와 평론, 칼럼, 기사, 사진, 영상 등을 전시했어요. 고향 후배 기업인이 거액을 후원해 건립했습니다. 62억원 건립비 전액을 투입했는데 쉽지 않은 일이지요. 참 고마운 일입니다."

-집필관도 들여 창작지원과 교육 기능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작가 지망생과 후진 작가들을 위해 숙박형 창작공간을 들였어요. 스스로 식사만 해결하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운영은 홍상문화재단이 맡는데, 논산 지역의 문화거점으로 활용되도록 할 계획입니다. 홍상문화재단도 이번에 문학관건립 비용을 부담한 아이디앤플래닝 남상원 회장이 출연해 만든 재단인데, 제 이름에서 '홍' 자와 남 회장의 '상' 자에서 따와 지었어요. 남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저도 앞으로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저도 가끔 문학관에 내려가 지내려 해요."

-얼마 전 본의 아니게 의원님 이름이 회자됐어요. 바른미래당이 사개특위 위원을 오신환 의원에서 채이배 의원으로 사보임했는데, 첫 사보임 사례가 16대 국회 때 의원님이었다면서요.

"당시 의약분업법을 통과시켰는데, 시행을 1년 연기하자는 거예요. 법을 만들어서 시행도 안 해보고 연기하자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반대했어요.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었는데 당론에 반대를 한 거지요. 일부 제약업체와 이익단체들의 반대로 당이 주춤한 겁니다. 왜 반대를 했냐면, 당시 우리나라가 거의 항생제 실험국가였습니다. 다국적 제약사에서 싸게 공급을 해요.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의약분업이 되면 항생제 남용을 좀 막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고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당시 헌법소원까지 제기했지요?

"환경위로 쫓겨났어요. 결국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헌법소원을 제기했어요.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에 당에서 자체 해결하라는 판결을 내렸어요. 그래서 저는 국회의장에게 사인해주지 말라고까지 했어요."

-그 일로 국회의원 사퇴를 하셨지요.

"임기 6개월 정도 남겨놓고 의원직을 사퇴했어요. 2003년 12월 10일이 정기국회 끝나는 날이었는데, 그날 국회 단상에 올라가서 사퇴를 선언했어요. 국회의원 할 때부터 제 소신에 반하는 결정을 하게 되면 미련 없이 사퇴하겠다고 했거든요. 나는 한 번도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본 적이 없어요. 언제든지 물러날 각오로 일을 하겠다고 처음부터 작심하고 시작했으니까."

-국회의원 하시면서 국회 보건복지위만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보건복지위원회에만 들어갔어요. 제일 인기가 없는 상임위가 보건복지위였어요. 사회적 갈등을 다루고 골치 아픈 일이 많으니 서로 안 갈려고 하는데 저는 자발적으로 거기만 신청을 하고 갔어요."

-17대 때에는 당을 민주당으로 바꿔 출마하셨지요?

"당시 정동영 대표와 김한길 원내대표가 제가 시민단체 선정 의정활동 연속 1위를 하니까 저보고 종로에 출마하라는 거예요. 선거 40일 남겨놓고 공천을 받았어요. 다 공천하고 딱 한 자리 남은 게 종로였는데, 당시 정동영 대표가 노인 폄하 발언으로 구설에 오르는 바람에 공천을 못했던 거예요. 정 대표가 출마를 안 하는 대신 제가 공천을 받은 거죠. 선거 운동도 늦었고 또 병환에 있던 아내가 돌아갔어요. 선거운동을 못했지요. 500여 표 차이로 낙선했습니다."

-그 후 정치를 접으신 건가요.

"17대 낙선하고 바로 정치를 접었어요. 법륜 스님이 그 때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국회의원, 장관하는 거보다 잃어버린 우리 역사 발해를 찾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거예요. '대발해'를 준비하느라 틀어박혔지요. 저는 아직도 만년필로 쓰는데, 원고지 1만2000장을 썼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정치를 하시게 됐나요. 이미 80년대부터 밀리언셀러 작가로 유명인사가 돼 있었지만, 문학과 정치는 좀 거리가 있잖아요.

"제가 경실련에서 시민운동을 했잖아요. 90년대 초 상임집행위원을 했거든요. 김영삼 정권 때 김대중 총재가 민주당을 나가버리면서 남아있는 사람들과 재야인사들이 개혁신당을 만들었어요. DJ가 나갈 때 안 따라가 나간 사람이 노무현 유인태 제정구 이부영 김부겸 이철 박석무 원혜영 등이었어요. 종교계 시민단체 원로들이 나간 사람들을 비판을 했어요. 남아있는 사람들을 살려내려고 하다 보니 민주화운동과 시민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원로들이 불러들였어요. 장을병 총장, 홍성우 변호사, 언론인 성유보,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장기표, 그리고 저, 서경석 목사, 최열, 이미경 의원 등을 불러들였어요. 제가 홍보위원장을 했고요. 두 당이 합쳐 나중에 통합민주당이 된 거지요. 거기서 대변인을 한 거고 비례대표 4번을 받아 국회의원이 됐지요."

-그 전에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나요.

"관심이 없었는데, 노태우 정부 때 라디오 생방송을 하다가 잘린 적이 있어요. 김영삼 대통령 때는 아침 라디오 방송 '안녕하세요 김홍신 김수미입니다' 프로가 있었는데, 제가 생방송 시작하자마자 김영삼 대통령을 좀 깠어요. 방송이 잘렸지요. 그 때만 해도 그게 통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정치에 차츰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런 참에 김대중 총재께서 저를 몇 번을 불러 밥을 먹으면서 정치를 하라는 거예요. 저는 절대 안 하겠다고 했지요. 그러다가 김대중 총재가 민주당을 나가버리니까 더욱 더 안하겠다는 마음을 굳혔지요. 그때 시민운동 같이 하던 스님이 저한테 '그럼 머리 깎은 내가 해야 되겠냐?' 그러는 거예요. 원로목사님들도 성직자가 해야 되겠냐며 강권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정치를 하게 된 거예요."

-대하소설을 쓰게 되면 인물, 사건, 지명, 인물간 관계 등을 머리에 설계도처럼 꿰고 있어야 하는데요, 더군다나 역사적 팩트를 기반하니 너무 자의적으로 쓸 수도 없고요.

"발해 역사는 특히 더 힘들었어요. 남은 게 별로 없거든요. 그 이유가 백제 고구려 멸망할 때와 똑같은데, 당나라 소정방, 개필하력 이런 자들이 아주 처절히 우리 민족 말살정책을 폈어요. 당 고종에게 뭐라고 그러냐면 이 민족은 굴종할 줄 모르는 민족이고 반드시 다시 일어날 민족이기 때문에 남자는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다 죽이고 여자는 우리 군사한테 위문품으로 나눠달라는 거예요. 고종은 뜻대로 하라고 했고요. 당시 고구려 인구가 많아야 300백만명 정도였는데 거기서 20만명 이상을 당나라로 끌고 갔던 겁니다."

-왜 하필 발해였나요.

"오래 전부터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우리 역사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잖아요. 일제 강점기 식민사관에 찌들은 일부 식민사관학자들의 영향이 큰 데요.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우리 정체성도 세울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동이족이라고 하잖아요. 거기에 '이'자가 있는데, 이게 오랑캐라고 하는데, 오랑캐가 아니에요. 큰 '대' 자 속에 활 '궁'을 겹친 모양인데, 원래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공자가 논어에서 밝혔어요. '나는 이다음에 군자의 나라 사람들이 사는 동쪽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어요. 원래 이 '이'자가 군자 '이'자입니다. 군자 '이'라고 해놓은 것을 제가 중국자전에서 찾았어요. 이 사전은 원래 중국에서 만든 겁니다. 중국인들이 군자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원래 군자라는 거지요."

-발해를 소위 강단 사학계에서는 정통 역사로 보지 않으려 하는데요. 통일신라와 병렬시켜 '남북국 시대'로 보는 학자도 있긴 하지만요.

"그게 식민사관의 영향입니다. 제가 역사를 학문적으로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민족, 특히 고대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만주와 요동 요서까지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그게 맞는 거예요. 발해는 고구려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어요. 사방이 5000리가 되었어요. 요서(遼西) 지역에서 홍산문화(紅山文化)라는 거대한 역사의 타임캡슐이 실제로 열리고 있잖아요. 우리 역사의 강역을 넓혀야 해요. 그게 사실에 부합합니다. '대발해'를 쓰기 위해 만주와 연해주 등을 십수 차례 다녀왔는데, 남아있는 유물 유적을 보면 대번에 발해가 우리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역사의 정통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먼저 협소한 시야부터 넓혀야 해요."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현대사도 달리 보고 있잖아요. 보수 진영은 자유민주체제만이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고 진보는 자유민주를 일단 제쳐놓고 소위 '외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틀에서 정통성 부여를 확장하려고 해요.

"저는 진보의 생각이 옳다고 봐요. 임시정부 문제를 보자고요. 선열들이 그 핍박을 받으면서 정부 형태를 망명지에 세웠잖아요. 제가 '통일의병'이라는 단체의 대표를 했었는데, 관군은 의복 식량 등을 공급받지만, 의병은 자기가 그것을 모두 해결해야 해요. 임시정부 요원들도 의병처럼 자기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한 사람들이에요. 당시 나라 안에서 정부를 선포할 수가 없었잖아요. 밖에서 할 수밖에 없어서 밖에서 나라를 세운 겁니다. 그걸 인정해줘야지요.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임시정부에 참여할 수도 없는 거고, 그래서 대표자들이 임정에 참여한 거고 각 지방마다 조직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임시라는 개념으로 보지 말고 나중에 영토에 들어올 때 정상적인 정부가 된다는 전제를 달았기 때문에 임시정부도 건국으로 봐야 한다고 봐요."



-지금 좌우 이념 간극이 심각한데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요.

"시대적 상황이기도 한데요, 우리가 전제를 할 게 있어요. 반드시 통일이 돼야 한다는 겁니다. 통일로 가려면 먼저 우리 사회 갈등부터 해결이 돼야 해요. 이대로 통일이 되면 남북문제가 심각해지기 때문이에요. 경제부터 언어, 사고, 삶의 방식, 도구의 이용, 현대문명의 이기 등 엄청난 차이가 있잖아요. 그 전에 동서갈등이 해소돼야 해요. 그 다음에 진보·보수의 갈등이 조절이 돼야 하고요. 해결까지는 어려워요. 조절이 돼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수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한테 진보를 이해하라고 하면 이해하겠느냐고요, 또 진보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한테 보수의 가치를 이해하라고 하면 이해하겠어요? 이걸 조절을 해줘야 해요. 엄격하게 얘기하면 조화가 이뤄져야 해요."

-의원님 주장은 맞지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이렇게 봐야 해요. 내가 존재하려면 너도 존재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인정받으려면 내가 너를 인정해줘야 해요. 그 사람의 사고를 100%를 이해하라는 게 아니에요. 적어도 50% 정도는 이해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사회의 조화가 이뤄져요. 제가 국회에 있을 때는 제가 진보(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지만 합당으로 인한 것이었다) 진영이었는데, 북한 돕기 하자는 법을 제안하니까 보수 쪽에서 '김정일 이중대'라고 비판하는 거예요. 저쪽에서 보수 중의 보수 핵심 인사가 극렬히 비난을 해요. 그래서 제가 그 분에게 그랬어요. '선배님, 우리 진보를 인정해주십시오. 그러면 선배님이 보수의 상징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보로 인정받습니다' 그랬어요. 내가 당신을 인정할 테니 당신도 나를 인정해달라는 거였지요. 그리고 내가 당신들을 100% 인정하지 못하니 50%만 인정한다, 당신들도 나를 50%만 인정해 달라 그런 겁니다. 그 분이 제 손을 딱 잡더니 '고맙다' 그러시며 끌어안더라고요. 그 다음부터 그 사람들이 저를 안 미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끌어안고 가야 해요."

-그 주장은 진보진영이 주장하는 통일 방식인데요.

"통일로 가려면 북한을 먼저 끌어안아야 해요. 통일도 평화적 통일과 따뜻한 통일을 해야 합니다. 자 보세요. 통일이 되면 여기 사람들이 올라가서 땅 장사하고 뭐 그럴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 갈등구조가 커져요. 그러니까 따뜻한 통일을 해야 해요. 그러려면 북한을 미리 도와줘야 해요. 어린이들 영양실조 걸리지 않게 비타민이라든가 밀가루라든가 산림녹화, 비료 제공 등 이런 것들은 지금 해야 합니다. 그래야 통일이 됐을 때 융화가 잘 돼요. 보수 쪽에서도 진보가 북한 돕기를 한다고 하면 왜 그러는가 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친북이라 몰아세워서는 안 돼요. 통일이 되면 우리 경제가 5만 달러로 갈 수 있어요. 북한 지하자원을 기술력과 경제력으로 개발을 하고 통일이 되면 항만, 부두, 철도, 고속도로, 공항 뭐 어마어마하게 투자할 데가 많고 외자를 유치할 수 있잖아요. 우리 후손들을 생각하면 지금 빨리 통일을 해야 합니다. 지금 안 하면 영원히 두 나라가 된다고요. 따뜻한 통일이란 이렇게 지금부터 도와줘서 빨리 조화롭게 융화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보수 쪽에서는 북한을 도와주면 북의 특권층, 집권세력의 지배구조만 공고히 해주는 거라는 비판적 시각이 있는데요.

"옥수수 보내주고 의약품 보내주고 비료 보내주고 하는 것은 그들 배불려주는 것과는 상관없어요. 배고픈 형제를 도와준다는 인식을 해야 해요. 우리가 먼저 도와줘야 다른 국가나 국제기구가 도와줄 거 아닌가요? 그리고 또 생각해볼 문제가 우리에게는 전쟁의 상흔이 있잖아요, 그러면 처벌을 어디까지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할 수밖에 없어요. 화해를 해야 하는데, 용서의 관점을 대폭 늘려가야 합니다. 민족적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면 다 포용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 마음을 지금부터 가져야 해요."

-'통일의병' 대표을 하셨던데요. 좀 생소합니다.

"통일을 준비하는 민간 모임입니다. 가입을 하려면 선서를 하고 군번을 받습니다. 법륜스님 등이 만들었는데요, 제가 대표를 한 3년 하다 작년 봄에 내놨습니다. 제가 처음에 군번 500번을 받았어요, 500명 채우려고. 금방 채워졌어요. 지금은 통일의병 군번 1000번입니다. 군번이 2000번까지 늘어났습니다. 통일을 연구하고 모금도 하고 그럽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통일을 준비하고 남북이 조화를 이뤄낼 채비를 해야 합니다."

-보통 서구 이데올로기 전개 모습을 보면 민족주의는 보수주의와 결부되는 경우가 많은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진보진영 사람들이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입니다.

"저는 민족의 문제만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자존심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내 존재가치를 스스로 존중하지 않으면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아요. 일제강점기 일본 사학자들은 우리 민족을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계속 주입하고 교육했어요. 중국은 너희 민족은 오랑캐라고 깎아내리고요. 이런 주장이 과연 옳은 주장인가요? 그냥 그들의 주장일 뿐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우리 주장이 있어야 되잖아요. 우리가 오랑캐가 아니듯이요. 그래서 역사 문제는 우리 자존심의 문제, 내 조상, 내 핏줄의 문제로 봐야 하고 우리 후손의 문제로 봐야 합니다. 진보 진영의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봐요."-아무튼 지금은 한·중·일 제 각각 민족주의 대립이 갈수록 첨예화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우리로서는 이럴 때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까요.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사고는 뼛속 깊이 박혀 있어 고치기 힘들어요. 우리가 그들의 공격성을 어떻게 현명하게 피해 가느냐는 것이 숙제입니다. 또 지금 우리에게는 북핵 문제가 있잖아요. 또 경제도 걸려있고 외교 군사적으로도 밀접해 있고요. 그럴 때일수록 정부는 큰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뭐가 문제가 되면 외교적으로라도 한 번씩 건드려 줘야 해요. 가만히 있으면 배타성이 강하고 자기 성찰이 안 된 그들로서는 자기주장이 맞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중국의 패권화가 더 진행되면 한·일 협력이 상대적으로 더 필요해지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한일 관계는 위안부 문제에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로 심각한 관계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박근혜 정부가 합의한 것은 잘못 한 겁니다. 서둘러 봉합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 분들은 그냥 우리 할머니라 생각해보세요. 우리 할머니가 당한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가볍게 풀지 않았나 싶어요. 할머니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어쨌든 일본은 가해자고 우리는 피해자잖아요. 물론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되지만요. 전에 한일 지식인끼리 선상(船上) 간담회가 있었어요. 거기서 저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일제가 한국인들에게 한 것을 생각하면 나는 혼자서라도 일본으로 쳐들어가고 싶다'고요."

-'인간시장'으로 최초의 밀리언셀러 작가가 되셨는데,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있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저는 어머니와 싸움하면서 컸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만화를 엄청 좋아했어요. 지금이야 만화책을 이해하는 부모가 많지만 그 때만 해도 만화책은 불량학생들이 읽는 거로 치부됐어요. 어머니는 제가 읽는 만화책을 보시는 족족 불구덩이에 넣어 불살랐어요. 말리니까 더 보게 되잖아요. 저는 또 몰래 만화책을 쌓아놓고 보고요. 어머니와 숨바꼭질 하면서 만화를 읽었지요. 만화책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제가 그림도 꽤 잘 그려요. 미대를 갈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중학교 들어가니까 만화보다는 책을 좋아하게 되더라고요. 그 습관이 있으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처음으로 백일장을 했는데, 제가 장원을 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너는 국문과'를 가라고 하셨어요. 미술선생님은 미대를 가라 하시고. 집에서는 의대를 가라고 하고요. 첫해에 의대 시험에 떨어져 다음 해 국문과에 들어갔지요. 요즘은 어떤가 모르겠지만, 당시는 국문과는 국물과라고 놀렸어요. 건더기 없는 국물과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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