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호 정경부 부장
![[박선호 칼럼] `운명`의 데자뷰](http://contents.dt.co.kr/images/201906/2019060302102269058001[1].jpg "[박선호 칼럼] `운명`의 데자뷰")
요즘 무엇인가 과거의 그 어느 순간과 비슷하다. 낯이 익다. 데자뷰다. "우리 경상수지가 83개월만의 적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대내외 조건의 악화 속에 우리 기업들이 애써 일궈왔던 흑자행진이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최근 신문의 머리기사다. 실제 수출은 이미 6개월 연속 감소세다. 내수도 꽁꽁 얼어붙은 지 오래다. 암담한 소식인데, 앞서 문 대통령과 정부는 뜻밖의 태도를 보였다. "우리 경제기초는 굳건하다. 나가는 길은 옳다."
외교를 질타하는 뉴스도 쏟아진다. "고립무원의 외교가 우려스럽다." 실제 지난 5월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박4일 일정으로 일본을 찾았지만 방문길에 우리나라도 찾아달라고 한 문 대통령의 청을 거절했다. 사드사태 이후 중국과 관계회복은 요원하고 일본과 관계는 악화일로다.
하지만 역시 정부의 태도는 현실과 큰 차이를 보인다. "한미 동맹은 요지부동이다." 매 정권마다 아쉽지만 이반(離反)의 순간이 있다. 그 때마다 매번 낯익은 장면들이 되풀이된다. '운명'의 데자뷰다. 가장 가까워 기억이 생생한 박근혜 대통령은 "제가 잘하라고 했는데 …"는 엉뚱한 말로 '한국판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지적까지 받았다. 최근 문 대통령의 태도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그 '운명'의 순간과 닮아가고 있다. 안타까운 몽니마저 엿보인다.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도발 뒤에 우리 정부는 오히려 "96억원 인도적 대북지원을 하겠다"고 나섰다. 북에 우리의 순수성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다. 아쉽지만 북한 자체가 그리 순진해 보이지 않는다. 현 정부에게 우리 재정은 '화수분'인 모양이다. 재정 확대로 '소득주도성장'의 성과를 보다 분명히 하겠다고 나섰다. 다행히 당장 증세는 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미 부동산 공시지가를 올려 부동산 소유주들의 공분을 잔뜩 산 정부가 증세 여력은 있는지도 모르겠다.
증세 대신 빚을 내기로 했다. 지난 2018년 680조이던 나랏빚이 2022년 956조로 늘어나게 됐다. 학계 일부는 벌써 '적정 수준의 나랏빚'을 놓고 논쟁을 벌인다. 어떻게 빚에 적정 수준을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까? 정작 '빚이 정말 필요한 것이냐, 아니냐'는 논쟁은 뒤로 슬쩍 밀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사실이 있다. 세상엔 공짜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자 없는 빚이 없고, 갚지 않아도 되는 빚은 더더욱 없다. 오늘의 세금이 아니어도 내일의 세금으로 갚아야 한다. 낭비성 빚은 어떤 경우에도 독으로 돌아온다.
세계 원유 매장량 1위국인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정작 차에 기름을 사지 못해 매번 주유소 앞에서 길게 줄을 서야 한다고 한다. 제 때 빚을 갚지 못한 나라의 말로다. 사실 우리 스스로 과거 국가 파산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 우리 국민의 '운명'의 데자뷰다. 굳이 되풀이 할 필요 없는 일들이다. 현 정부는 최소한 그 동기가 순수하다는 점을 믿기에 더욱 안타깝다. 하지만 '정의로운 정부가 반드시 좋은 정부가 아니다'는 사실도 알았으면 한다.
이쯤 되면 다시 옛 기억이 떠오른다. 지난 2011년 문 대통령은 '운명'이란 책을 냈다. 자신의 자서전이며, 정치입문 고백서요, 출마의 변이다. 그런데 책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으로 시작해 그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문 대통령은 책에서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좌우명,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말의 의미 풀이를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은 요즘 말로 하면 '복지국가의 꿈'이라 할 수 있다. 경제적 복지를 넘어서서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누구나 똑같이 존엄한 세상을 뜻한다". 정말 아름답고 순수하다. 그러나 역시 분명한 것은 노 전 대통령의 "사람 사는 세상"의 세상은 '발전된' 세상이지, '부도난' 세상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노 전 대통령도 결국 경제성과가 국민 기대치에 모자라 정권을 내줬다. 당시 이명박 후보자는 각종 비리 의혹을 받았지만 "경제 '하나'는 잘 할 것"이라는 평을 받으며 정권을 물려받았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책의 마지막 문 대통령이 고 노 대통령에게 한 말이다. 운명의 데자뷰를 되풀이만 할 것인가? 보다 더 나은 진보의 미래로 나아가갈 것인가? 문 대통령이 풀어야 할 진정한 숙제다.
박선호정경부장 shpark@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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