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의 니하오 차이나] 5·4와 6·4는 끝나지 않았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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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서의 니하오 차이나] 5·4와 6·4는 끝나지 않았다
박영서 논설위원
1919년 5월 4일, 일요일이었던 이날 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베이징(北京)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대학생 3000여명이 "칭다오(靑島)를 반환하라" "매국노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반일(反日)시위를 벌였다. 군벌정부가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자 항일 및 반(反)군벌 운동으로 확산됐다. 중국 최대도시 상하이(上海)에선 노동자들의 파업(罷工), 상인들의 철시(罷市), 학생들의 동맹휴학(罷課)을 아우른 '3파(罷) 운동'이 일어났다. 상하이의 도시 기능이 마비됐다. 저항의 열기가 거세지자 6월 10일 정부는 손을 들었다. 친일 관료 3명을 파면하고 파리강화회의 조인을 거부했다. 돤시펑(段錫朋), 뤄자룬(羅家倫) 등 5·4운동을 이끈 주동자 5명은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됐다.

5·4 운동은 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패전국 독일로부터 빼앗은 산둥(山東)성의 권익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중국에 반환되지 못한데 대한 분노가 폭발하면서 일어났다. 마오쩌둥(毛澤東, 당시 26세)과 저우언라이(周恩來, 21세)도 이 때부터 혁명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5·4 운동을 계기로 쑨원(孫文)의 국민당이 본격적으로 조직화되고, 중국 공산당이 탄생하며 1차 국·공합작이 성립돼 군벌정부 타도로 이어진다.

5·4 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난 4일 당 기관지 런민르바오(人民日報)는 "민족의 위기를 맞았을 때 5·4 운동이 터져 나왔다"면서 "이는 위대한 애국혁명 운동이자 위대한 사회혁명 운동이고, 위대한 사상계몽 운동"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에선 100년전 일어났던 청년학생들의 자발적인 저항은 인정되지 않는다. 시진핑(習近平) 지도부는 대중들의 동향에 극도로 예민하다. 사람들이 모이면 반체제 활동으로 변질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청년학생들이 모이는 것이 허용될 리 없다.

[박영서의 니하오 차이나] 5·4와 6·4는 끝나지 않았다


시 주석의 5·4운동 기념식 연설에는 오는 6월 4일 톈안먼 민주화시위 30주년을 앞두고 발생할 지도 모를 학생들의 반(反)정부 시위에 대한 우려감이 담겨있다. 시 주석은 연설에서 "청년의 마음으로 당에 봉사하여 신시대를 세우자"며 당에 대한 복종을 강조했다. 시 주석은 100년 전 일제에 저항한 5·4운동 기념 연설에서 '항일'(抗日)을 한 자도 언급하지 않고 "애국주의의 본질은 국가와 공산당을 사랑하는 데 있다"며 공산당에 복종하는 '애국'만 강조했다. 5·4운동의 또 다른 핵심정신인 '민주'도 거론하지 않았다. 중국 정부가 노동절(1일) 다음의 2, 3일을 임시휴일로 정해 5·4기념일까지 황금연휴에 포함시킨 것도 시위를 우려한 조치일 것이다.

젊은 층의 사상 통제를 강화하고 체제 비판을 봉쇄하는 현 상황은 문화대혁명 시대와 비슷하다는 말까지 나온다. 올해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과 행사가 줄지어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 봉기 60주년(3월10일), 파룬궁(法輪功) 시위 20주년(4월25일), 5·4 운동 100주년(5월4일), 톈안먼 사태 30주년(6월4일), 신장(新疆)위구르 폭동 10주년(7월5일), 신중국 건국 70주년(10월1일) 등이다. 당 지도부는 정치 안정이 최우선 순위라고 보고 경계심을 바짝 높이고 있다.

5·4운동, 6·4사태의 무대였던 텐안먼광장은 짙은 스모그 속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낡은 것은 갔는데 새 것은 오지않는다. 5·4와 6·4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아직도 성취해야 할 목표인 듯하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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