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 칼럼] 김대중과 오부치, 문재인과 아베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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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서 칼럼] 김대중과 오부치, 문재인과 아베
박영서 논설위원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정계의 대표적인 지일파였다. 일제 강점 시대 학교를 다녔던 만큼 일본어도 유창했다. 그는 서울 주재 일본 기자들을 만나면 "일제 시대 내 성이 토요타(豊田)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 정치인에 있어 금기인 '과거의 일본 이름'까지 밝힐 정도로 스스럼없이 소통했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총리도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일본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지인들에게 한국에 대해 자주 묻곤 했다고 한다. 총리 취임 직전까지 외무장관을 맡아 한국측과 많은 교류를 가지기도 했다.

두 정상은 배려와 결단을 바탕으로 21년전 만나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라는 큰 그림을 만들어냈다. 1998년 10월 8일 두 사람은 도쿄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했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다. 오부치 총리는 "식민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한다"고 밝혔다. 패전 이후 일본의 반성과 사죄가 공식 문서에 처음으로 남겨진 것이었다. 김 대통령은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 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고 화답했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1965년 한일관계 정상화 이후 가장 획기적인 관계 진전이었다. 한국 정부는 이 선언에 따라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단행했다. 국내 대중문화가 붕괴될 것이란 위기감이 있었지만 김 대통령은 결단했고 한류가 일본에서 싹트는 시작점이 됐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한일 교류의 새 지평이 열린 것이었다.

물론 공동선언 이후 영토·위안부·역사교과서·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 등 민감한 역사적 사안들이 부각되면서 양국 관계는 부침을 거듭했다. 그런데 최근의 한일 관계는 이전과는 사뭇 차원이 다르다는 느낌이다. 우리 대법원의 잇따른 일본 기업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그에 따른 자산 압류에 반발해 일본 정부는 연일 경제보복 가능성을 공식화하고 있다. 관세 보복, 비자 발급 정지 같은 거의 외교관계 단절 직전의 조치들까지 거론되고 있을 정도다. 현재 한일 관계는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 간 관계가 최악일때 이를 호전시키기 위해선 무엇보다 지도자 간 관계가 중요하다. 서로 흉금을 열고 솔직하게 대화해 그 차이를 인정한 다음 그 틈을 메워나가는 그런 지도자들의 관계가 지금 한일 양국에겐 필요한 듯 싶다. 그렇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서로 소통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두 사람은 많은 차이가 난다. 우선 문 대통령은 흙수저 배경, 아베는 금수저 배경이다. 문 대통령은 월남한 실향민의 장남으로 가난한 환경속에서 자랐다.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고초를 치렀고 우여곡절 끝에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정치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아베는 다르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유학도 했다. 외할아버지, 아버지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엘리트 정치가문 출신으로 젊을 때부터 일찍 정치계에 투신한 인물이다.

반면 닮은 면도 있다. 정치가로서 상황이나 환경, 정권을 잡게 된 배경 등을 볼 때 그렇다. 두 사람 모두 전(前) 정권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바탕으로 탄생했고, 정치적 실패를 경험하면서 뜻을 이뤄냈다. 또한 최고통치자를 아주 가까이서 직접 경험했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근무했다. 아베 총리는 관방성 부장관을 거쳐 차기 후계자로 부상하는 동안 고이즈미(小泉) 전 총리를 밀착 보좌했다.

차이점도 있지만 공통점도 많은 두 사람이 '구존동이'(求存同異·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되 하나가 되길 힘쓴다)의 지혜를 발휘한다면 풀지 못할 문제도 없을 것이다. 이제 21년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정신을 되새기며 두 사람이 만나야 할 때다. 두 정상이 톱 다운식 담판에 나서 큰 그림을 그려내 다시 한번 미래지향적 관계의 주춧돌을 놓아야 한다. 함께 만나 악수하며 새로운 양국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장면을 두 나라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바란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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