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협력적 융합연구 위해 담장을 허물자

[포럼] 협력적 융합연구 위해 담장을 허물자
    입력: 2018-09-09 18:05
윤석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부원장
[포럼] 협력적 융합연구 위해 담장을 허물자
윤석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부원장
필자가 근무하는 KIST에는 문이 여럿 있다. 동대문구 회기로에 연결되는 정문이 있고, 북문은 화랑로14길로 이어진다. 여기에 쪽문이라고도 불리는 두 개의 회전형 게이트로 구성된 조그마한 서문이 있다. 차량은 정문과 북문을 이용해야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대부분은 바로 이 서문을 이용한다. 이 서문을 지나 월곡로18길로 명명된 짧은 골목길을 지나면 지하철 6호선 월곡역이 있다. 이는 정문이나 서문에 비해 대중교통까지 1km 정도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이다. 서문을 설치할 때, 당연히 직원들은 반겼지만 일부 주민들은 반대했다. 많은 사람이 오가다 보면 조용한 주택가 분위기를 훼손시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정주여건을 훼손하는 일이 발생할 경우 폐문 하겠노라 약속하며 어렵사리 서문을 열었다.

하지만 많은 직원이 출퇴근길로 이용하다 보니 우려는 현실이 됐다. 창고였던 곳에 편의점과 분식점이 들어섰다. 길에 접해 있는 벽을 허물어 여성의류 가게를 차렸다. 파라솔이 설치되고 탁자와 의자가 놓인 카페가 자리 잡았다. 조용한 주택가 분위기를 훼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그러나 폐문하라 하는 주민도 없었다. 서문은 월곡로18길을 혁신으로 인도하는 일종의 앵커시설이었다. 서문은 시장을 열었고 골목길을 탈바꿈한 것이다.

대한민국에게 기술추격 전략은 기술입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문이었다. 빠른 기술 습득과 효율적인 생산 방식으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상품을 생산가능하게 했다. 또한 미국, 유럽 등 수출 시장으로 안내했다. 수출 시장은 기업의 탄생, 일자리 창출,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 국가 혁신을 가능하게 했다. 그 시장에 중국이라는 막강한 패자(覇者)가 나타났다.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세계 1위 제품의 수가 71개에 불과한 반면 중국은 1693개에 달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문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국가 최초 과학연구단지인 홍릉이 담당해야 할 새로운 임무라고 믿는다.

홍릉이 열어가야할 새로운 문의 청사진을 그려 볼 요량으로 스웨덴의 시스타 사이언스 시티를 방문했다. 시스타는 무엇으로 1990년 초반 스웨덴의 사상 최악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을 제공했을까? 또 2000년 중후반, 입주기업이 감소하는 등 IT산업 침체로 인한 클러스터 자체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었을까? 사실 첫인상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규모도 대덕연구단지의 35분의 1인 2㎢에 불과했다. 시스타의 모든 공공시설을 맡고 있는 일렉트룸(Electrum)재단 대표 요한 에드마크와 만남에도 새로운 것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헛헛한 마음으로 일렉트룸 건물을 나서려는 순간 눈에 뜨인 것은 중앙 홀에 위치한 개방형 계단이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다른 이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공간에서라면 원활한 소통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민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이를 만나는 것도 용이할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일렉트룸의 개방적 운영이란 말이 겉멋을 위한 클리셰가 아니었다. 사소한 공간 하나에도 스며든 철학이었다.

시스타에서 배워야할 교훈이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닌 사소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바뀌자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시스타는 아침이면 꾸역꾸역 모여들고 저녁이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일터만이 아니었다. 시스타는 ABC(Arbete, Bostad, Center)원칙에 따라 직장이자 행복을 키워 나가는 집이며 문화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시스타는 온전히 삶을 담은 터전이었기에 지역에 대한 애정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높은 레질리언스 역량을 보유할 수 있었다.

마지막은 경계의 부재였다. 일렉트룸 한 건물에 기업, 대학, 연구소가 구분 없이 입주해 있다. 교류회, 세미나를 통해 긴밀히 소통하고, 협력적 융합연구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한껏 누리고 있었다. 대학은 기업과 연구소가 원하는 인재를 키워낼 수 있고, 기업과 연구소는 대학의 창의성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홍릉기관들이 담장을 낮춰 문화와 융합이 싹 틀 수 있는 원캠퍼스로 만들자고 의견을 모은 것과 같은 이유였다.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으로 꼽히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처럼 잘나가는 클러스터도 모두 비슷하게만 보이지만 노력 없는 성과는 없었다. 이제 뜻과 힘을 모아 실천하는 현재로 미래의 새로운 문을 열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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