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인문학] 인문학과 모호한 말들, 이창동의 `버닝`

[디지털인문학] 인문학과 모호한 말들, 이창동의 `버닝`
    입력: 2018-07-17 18:00
조만수 충북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디지털인문학] 인문학과 모호한 말들, 이창동의 `버닝`
조만수 충북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들은 넘쳐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인문학의 담론을 믿을까?
상상력, 창조성 등 단어들로 인문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지만 사실 창조적인 상상력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하는 인문학 서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문학은 항상 모호한 말들을 만들어낸다. 인문학은 사실을 기초로 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인문학적 담론은 때로 허구처럼 들린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성경 구절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떤 경험적이고 물리적인 사실에 기초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말'에 기초한다. 빛이 있어서 빛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 아니라, "빛이여 있으라"는 말이 있어서 빛이 생겨난다. 근거 없는 말, 모호한 말에 천지가 근거한다고, '성경'이라는 인문학적 담론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호한 말을, 이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품이 좀 불친절하다고 말한다. 분명 '버닝'은 '모호한' 영화이다. 여주인공 해미는 죽은 것인지, 해미가 죽었다면 벤이라는 수수께끼의 남자가 죽인 것인지, 그리고 또 종수는 어떻게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확신하고, 벤을 죽이는 것인지, 알듯하면서도 완전히 수긍되지 않는다. 이처럼 수긍되지 않는 영화를 우리 앞에 내놓은 것은 감독이 정교한 논리적 구성을 만들어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모호한 이야기 앞으로 우리를 데려가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명확성의 세계는 있다/없다, 참/거짓, 진실/허구의 이분법에 근거한다. 해미가 어렸을 때 빠졌었다고 이야기하는 우물은 과연 실제로 있었을까? 없었을까? 모두 없었다고 확언하지만 종수의 엄마는 그곳에 '마른' 우물이 있었다고 알려준다. 그렇다면 우물이 있었다는 것일까? 그런데 물이 없는 우물은 우물인가 우물이 아닌가? 해미의 방은 북향이기 때문에 하루 종일 해가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남산타워에 비쳐 굴절된 햇살이 잠시 방에 들어온다. 거울에 반사된 빛은 진짜 햇빛인가 아닌가? 종수가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해미의 고양이는 실제로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마른 우물, 반사된 빛, 해미의 고양이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현실이면서 허구인 것 즉 이분법을 벗어난 것들이다. 모호성은 참/거짓의 판별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하는 방식이다. 삶의 의미를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해미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부시맨 족의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대해 갈구하는 사람이다. 예언자의 말은 항상 모호하다.

종수의 축사 속에 혼자 남겨진 송아지는, 현실 속에 자명하게 존재하는 송아지이지만 이름이 없다. 그리하여 송아지는 존재하지만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해미의 고양이는 존재하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보일이라는 이름이 있다. 그리하여 이름 없는 다른 고양이를 보일이라고 부를 때, 그 고양이는 종수에게 다가온다. 마치 김춘수의 '꽃'처럼 그 이름을 부르자 종수에게 다가와 '보일이'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고양이가 해미의 고양이라는 증거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름 붙이기는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이름 붙이기가 하나의 대상과의 관계라면 삶의 흐름과 관계해서는 이름 붙이기는 '이야기하다'에 대응된다. 이야기는 현실을 허구화한다. 하지만 이 허구는 현실에 의미를 부여한다. 해미는 마른 우물을 물이 찬 우물로 허구적으로 변화시키고, 그 속에 빠졌다가 종수에게 발견된 이야기를 해준다. 가족들은 우물은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해미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바로 그 이야기를 통해서 종수는 해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름은, 그리고 이야기는 하나의 메타포이다. 메타포는 현실과 닮은, 현실이 아닌, 그러나 현실보다 강렬한 이미지이다. 메타포가 아닌 글, 모호하지 않은 글은 현실 앞에서 무력하다. 종수가 아버지를 위해 쓴 탄원서는 아버지가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는 것을 막아줄 수가 없다.

이창동 감독이 관찰한 해미와 종수의 현실은 온갖 싸구려 물건들로 가득한 그들의 집을 닮았다. 그리하여 현실 그대로 그것을 보여줄 때, 감독은 온갖 소음까지 그대로 담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황폐한 현실 그 자체를 보여준다. 이 황폐함이 '비닐하우스'이다. 해미와 종수의 삶 그 자체가 비닐하우스이다. 이 두 개의 황폐함의 만남은 어떤 의미 있는 도약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해미와 종수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이창동 감독은 그토록 무미건조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때로 이야기는 놀이가 된다. 새롭게 반복되는 놀이로서의 이야기는 황폐한 삶을 예쁘게 치장하는 장식과 같다. 그렇지만 이 놀이는 권태롭다. 벤은 항상 새로운 젊고, 가난한, 새 여자친구를 만든다. 그리고 그녀가 파티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는 벤은 하품을 한다. 그는 권태롭다. 그리하여 이 놀이는 두 달이 지나면 리셋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매번 포만과 허기를 반복하는 리틀 헝거의 이야기이다. 해미의 행방을 알기 위해 벤을 추적하던 종수가 저수지 둑에 선 벤에게서 본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권태이다. 놀이를 종료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 그것을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라고 부른다. 벤의 비닐하우스 태우기 놀이는 종수의 자위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해미의 방으로 잠시 들어오는 반사된 햇빛을 잡으려는 허망한 몸짓이다. 황폐함을 잠시 잊기 위한 행위이지만 황폐함을 더욱 상기시키는 행위이다. 어머니의 옷을 태워도 어머니는 사라지지 않고 더욱 초라해져서 돌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여기에 가상의 귤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야 가능한 해미의 마임같은 것이며 환각의 시간이 지나면 더 초라한 현실 속에서 깨어나는 대마초와 같은 것이다.

영화의 엔딩에서 종수는 벤을 칼로 찔러 죽인다. 그리고 마치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듯이, 종수는 벤의 포르쉐를 태운다. 그러나 벤의 죽음 바로 앞 장면에서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글을 쓰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벤의 살해 장면은 소설 속의 장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벤의 죽음이 반드시 소설 속의 죽음인지 현실에서 종수의 살해인지는 모호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죽였는가,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죽였는가를 가르는 이분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종수가 불타는 벤의 포르쉐를 뒤로 하고, 자신의 트럭을 몰고 떠날 때, 뒤 창문으로 보이는 불타는 자동차는 마치 노을 속에서 타오르는 태양 같다. 어두운 해미의 방으로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들어오던 빛을 잡으려 애태우는 것이 아니라, 종수는 이제 스스로 태양을 만들어낸 것이다. 허구 속에서 세상을 창조하는 것, 그것은 왜 자위행위가 아닐까?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말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포르쉐를 태워 태양을 만들면서 이창동은 모호한 말을 예언처럼 내뱉는다. "빛이여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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