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디지털인문학] 시학과 정치학 사이](http://contents.dt.co.kr/images/201712/2017120102102251607002[1].jpg "[디지털인문학] 시학과 정치학 사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철학자라 불린다. '인간의 행동과 기술과 학문이 모두 좋은 것을 추구하는데, 좋은 것들이 다 모인 곳의 최정상에 행복이 있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지고의 가치인 행복에 이르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그는 인간에게 가장 고유한 '덕'(德)을 실현해야 한다고 했다. 덕은 '아레테'(arete)를 옮긴 말인데, 한 존재의 기능을 잘 수행하는 탁월성을 가리킨다. 예컨대, 눈의 아레테는 잘 볼 때 드러나며, 따라서 잘 보는 눈은 유덕한 눈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사람 구실을 제대로 잘 할 때, 그는 아레테를 가진 덕스러운 사람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사람을 '스프다이오스'(spoudaios)라고 표현했다. 사회적 위치도 높고 능력도 뛰어나며 행동과 태도가 진지하고 품격이 있는 '고귀한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결론은 분명하다. 덕을 갖추고 실천을 통해 탁월성을 실현하는 고귀한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그래서 그는 덕의 윤리학자라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이 혼자가 아니라 정치공동체(polis) 안에서 살 수밖에 없는 '정치적 동물'이라면, 그의 윤리학적 결론은 정치학으로 확장된다. 인간의 좋음, 좋음들 중 가장 좋은 행복은 궁극적으로 정치공동체 안에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법을 정하고, 무엇을 배우고 알아야 하는지 교육을 설계하며, 그 밖의 다른 모든 시민생활에 필요한 것을 규정하고 기획하며 통제하면서 시민들의 행복을 극대화시키는 학문이 바로 '폴리스 운영의 학문'(politike), 곧 정치학이기 때문이다. 정치학의 목적은 시민들을 고귀한 사람으로 만들어 개인으로서는 물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덕을 실천하는 행복한 국가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학 역시 행복과 덕의 정치학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런 생각은 그의 스승 플라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플라톤은 시민들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덕을 구현하고, 모두가 조화를 이루며 산다면 국가는 정의롭게 운영되며 시민들은 행복을 누린다고 믿었다. 그런 정치공동체를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라 불렀다. 그런 나라를 이루려면 철학자가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정치학의 논리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 논리 앞에서 시인들은 저지되고 정죄된다. 시인은 정치적 이념과 목적에 부합하는 작품을 쓰는 데 순응하고 협력하기보다는, 인간의 나약한 감성, 죽음에 대한 두려움, 친부살해의 신화와 역사의 진상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실하면서도 절제하는 생산자들, 용감하게 적과 싸우는 군인들, 지혜롭게 진리를 추구하고 국가를 다스려나가는 철학자들의 교육에 해롭다. 그런 시를 짓는 시인들의 블랙리스트는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그들을 추방할 수 있는 합법적인 위력으로 작동하며, 사회를 건전하게 지켜내기 위한 듬직한 수호자로 여겨진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시인들의 진지한 비딱함을 정확하게 감지했다. 그들이 정치나 교육의 논리 바깥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음을 목도한 것이다. 실제로 당시 최고 장르였던 비극과 전통적인 서사시는 고귀한 자의 몰락과 불행을 무대에 올려놓았고, 희극은 사회의 전통과 신화, 지도층을 비판하고 조롱했다. 봄에 디오뉘소스 극장에 모인 모든 시민들은 고귀한 영웅의 파멸을 충격적으로 바라보며 공포와 연민에 휩싸였다. 그 충격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겐 더 아픈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덕을 갖춘 고귀한 자의 행복을 윤리학과 정치학으로 테제화한 철학자였으니까.
그러나 그는 플라톤처럼 시인을 내쫓으려 하지 않았다. 덕을 갖춘 고귀한 사람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려는 비극을 탐구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새로운 비밀에 직면했다. 인간은 덕을 갖추었을 때, 좋은 사람이 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조심하라. 아무리 덕을 갖춘 고귀한 사람일지라도 불행해질 수 있음을. 그것이 인생임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비껴갈 수 없는 운명적인 역설과 그 역설을 드러내는 비극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직시했다. 그리고 고귀한 자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것이, 비록 정치학과 윤리학의 당위적 명제에 위배되더라도, 시로서는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했다. 시인의 통찰과 표현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떨리고 울먹이는 심정으로 직시해야 하는 삶의 또 다른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시학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이 높은 품격을 유지하는 비결이 바로 그 믿음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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