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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즐겁지 `않은` 사라

조만수 충북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입력: 2017-09-21 18:00
[2017년 09월 22일자 22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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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즐겁지 `않은` 사라
조만수 충북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즐거운 세상을 원했지만 정작 본인의 삶은 전혀 즐겁지 못했던 작가 마광수가 얼마 전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80년대 후반 그는 수필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로 일약 화제의 중심에 선 작가가 됐다. 그는 정신을 육체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세태에 반항하면서 "행복은 오직 관능적 쾌감"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소리 높여 주장했다. 그리하여 관능적 쾌감을 추구하는 본성에 충실한 인간을 그는 들판(野)의 동물성을 가진 존재 즉 '야한 여자'라고 불렀다. 그는 '야한 여자'로서의 인간 본성을 펼칠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을 '장미여관'이라 명명했고, 문학이라는 허구적 상상력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그곳으로 함께 가볼 것을 청유했다.


난 네 발냄새를 맡고 싶어, 그 고린내에 취하고 싶어
네 치렁치렁 긴 머리를 빗질해 주고도 싶어
네 뾰족한 손톱마다 색색가지 매니큐어를 발라 주고도 싶어
가자, 장미여관으로

진지하고 숭고한 문학을 위선이라고 거부하면서 자신의 문학의 목표를 허구를 통한 '대리 배설'로 설정했기에, 그의 글은 깊이를 '적극적'으로 결여하고 있었다. 쉽게 말한다면, 미학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는 언어를 마광수의 문학은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권위주의 시대에 억눌린 성적 욕망을 담론의 장으로 끌어내고, 욕망의 적극적 실현을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에 대중들은 호기심 있게 반응했다. 대중들의 호응에 고무돼 작가 마광수는 보다 과감한 문학적 표현을 시도한다. 91년 발표된 소설 '즐거운 사라'가 그것이다. 이제 작가 마광수는 자신의 주장을, '사라'라는 허구적인 몸을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발화하기 시작했다. '사라'라는 이름은 흔한 서구적인 이름이면서도 동시에 육체를 의미하는 '살'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며 또한 '살아' 즉 '삶'을 연상시키기도 이름이기도 하다. 살의 쾌락을 예찬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대생 사라는 세상의 모든 것을 성과 관련해 사유하고 욕망하는 존재였다.

요즘 웬만한 나이트클럽에서는 맥주를 큰 병으로 팔지 않고 작은 병으로만 판다. (...) 얄미운 장삿속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작은 맥주병이 마음에 든다. 귀엽고 앙증맞게 생긴 것이, 꼭 어린 사내아이의 사타구니 사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고추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쪽쪽 빨아대면 싱그럽고 청초한 액체가 빨려나올 것만 같다. ('즐거운 사라', p. 11)

하지만 작가 마광수의 주장이 허구적 몸인 여대생 '사라'를 얻게 되자 그를 향한 사회의 공격이 강화됐다. 우선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제재를 받아 출판이 중단됐다. 92년 작가 마광수는 출판사를 바꿔 다시 출판했고, 이번에는 검찰이 그를 음란물 출판으로 구속했다. 이후 95년 대법원에서 그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형이 확정됐다.

표현의 자유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마광수라는 작가는 이후 급격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즐거운 사라'를 다시 반추해보는 것은 작가 마광수를 재평가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그의 죽음의 소식을 접했을 때, 내가 처음 생각한 것은 이 철저한 망각에 관한 것이었다. 도서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대출하려고 서고를 찾아보니, 이제 읽는 이가 거의 없어서 '보존서고'에 비치돼 번거롭게 따로 신청해야 했다. 학생들에게 책을 보여주며 물어보니 제목 때문에 어처구니없어 웃으면서도 정작 작가 마광수를 아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작품과 작가,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건은 불과 20년의 사이에 '사라'와 동년배의 대학생들에게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마광수에 대한 망각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주장한 바의 '위선 없는 성의 향유'가 현재의 젊은이들에게는 이미 자연스러운 것이 됐다는 점에 있다. 그들에게 너의 성을 마음껏 향유하라는 주장은 당연한 말을 진지하게 하는 우스꽝스러운 것이 돼버렸다. 마광수 작가의 주장이 이제 자연스러운 것이 됐다면, 그를 단죄한 논리는 더욱 더 우스운 것이 됐다. 결국 한 시대에, 작가의 문학적 표현물을 사회적, 법률적 심판의 대상이 되도록 몰아세웠던 논리는 겨우 십 수 년의 시간밖에 지탱하지 못하는 허약한 논거에 불과한 것이었다. 당시 사건의 담당 판사도 이를 모르지 않았기에 "이 판결이 불과 10년 후에는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판사로서 현재의 법 감정에 따라 판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결문에 명시했다고 한다.

'즐거운 사라'에 대한 유죄판결은 창작물과 법의 심판의 관계를 환기하면서 동시에 법과 윤리의 관계를 환기한다. 이 작품이 사회적 쟁점이 된 것은 단지 법률적 제도인 검찰과 사법부가 작품을 단죄했기 때문이 아니다. 마광수의 글들이 제시하는 바에 대해 당시의 사회의 일반적 윤리의식이 이를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우리 사회는 한 시대의 윤리적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는 논의와 주장에 대해 가차없이 공격적이며 그 현실적 귀결이 사법적 단죄였던 것이다.

그런데 마광수 작가가 우리 사회의 성과 관련된 윤리의 위선에 의문을 제시할 때, 그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을 주는 것이 과연 사법기관이어야 했을까? 다시 말해 한 사회의 윤리의 최종적인 담지자가 과연 검찰과 사법부일 수 있는 것일까? 법이 윤리를 규정할 수 있을까?

윤리란 존재의 가치와 관련된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궁극적인 이유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윤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기 위해 설정하는 규범들의 토대가 된다. 반면에 법률은 그 규범들의 영역에서 인간의 행위를 판단한다. 법률이 존재의 가치를 설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부영역에서의 규범에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것이다. 윤리는 가치의 판단의 영역이기에 신념의 갈등을 수반한다. 이 갈등의 양상 속에서 한 사회의 윤리적 지평은 움직인다. 이 움직임이 십 수년 만에 마광수의 도발적 주장을 전혀 문제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일방적인 힘의 행사인 법률적 판단은 이 움직임 속에서 무력하며, 결국 시간 이 흐르면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신념의 갈등을 한 사회가 수용하는 방식은 토론이다. 토론은 결론을 빠르게 도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갈등 속에서 가치를 성숙시키는 방식이다.

법정에서 작가 마광수와 검찰은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을 두고 공방을 벌였다고 한다. 작가는 문학적 대리만족, 대리배설의 개념으로 자신을 옹호하고, 검찰은 카타르시스가 정신적, 심리적 정화를 위한 것이지 성적 욕구의 해소와 관련이 없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 개념인 카타르시스는 '비극' 미학의 본질을 이루는 개념이다. 결국 카타르시스가 발생한다는 것은 두 신념의 체계가 폭력적으로 충돌해 파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가 마광수는 비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으며, 사법부는 자신들이 예상한 대로 이 사건을 되돌아 볼 때 비웃음의 대상이 됐다. 이 사건은 비극이면서 동시에 코미디인 셈이다. 우리에겐 어디에도 즐거운 사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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