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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전쟁과 영화` 그리고 사드

하선규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입력: 2017-06-29 18:00
[2017년 06월 30일자 22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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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전쟁과 영화` 그리고 사드
하선규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폴 비릴리오(P. Virilio, 1932~)는 프랑스의 저명한 매체이론가이자 문명비평가다. 팔순이 훌쩍 넘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왕성하게 집필 활동 중이다. 그의 대표 저작에 속하는 '속도와 정치'(1977), '사라짐의 미학'(1980), '전쟁과 영화'(1984) 등이 이미 오래 전에 우리말로 번역된 터라, 비릴리오는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그리 낯선 이름이 아니다. 이 저작들 가운데 필자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책은 '전쟁과 영화'이다.

전쟁과 영화? 필자처럼 386세대, 혹은 바로 아래 486세대에 속한 이들은 이 제목을 듣자마자, 수많은 전쟁영화들을 떠올릴 것이다. 1970년대, 그러니까 조국 근대화란 구호 아래 박정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우리 세대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전쟁영화를 보았다. 간혹 동네 삼류 극장, 혹은 아주 특별한 날에 일류 극장(소위 '개봉관')에 가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 흑백텔레비전을 통해서였다. 전쟁영화는 그 시절 순진한 어린 영혼들에게 '절대선'(미군 혹은 연합군)과 '절대악'(독일군 혹은 일본군)이라는 냉전시대의 '진실'을 명확히 각인시켜 주었다. 용기, 절제, 신중함, 배려, 리더십, 전우애 등등의 미덕들도 적절하게 섞어서 말이다.

그러나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는 이런 의미의 전쟁영화 장르에 대한 책이 아니다. 그의 시선은 훨씬 더 근본적이며 심층적인 차원을 겨냥하고 있다. 비릴리오는 전쟁과 기술문명, 전쟁과 대중매체 사이의 '내밀한 연관성'을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그 감춰진 실상을 들춰내려 한다. 여기서 말하는 '내밀한 연관성'은, 단지 전쟁이 첨단 기술이나 무기를 필요로 한다거나, 대중매체들이 전쟁을 옹호하는 프로파간다에 적극 투입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연관성의 핵심은 훨씬 더 은밀한 곳을 향해있다. 곧 인간의 몸과 마음의 내부, 몸과 마음의 '새로운 조직과 구성'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비릴리오는 말한다. "전쟁은 우선적으로 일종의 관음증자이다. 전쟁은 목표로 하는 대상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더 빨리 보려는 자이다." 만약 전쟁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주체로 상상한다면, 이 주체의 욕망은 전적으로 대상(=敵)을 최대한 빨리 보고, 파괴하는 일을 향해있다. 사진, 영화, 텔레비전과 같은 대중매체들은 바로 이 전쟁-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기술에서 탄생했다. 다시 말해, 시각장(視覺場)을 원격으로 확장, 지배하려는 기술혁신의 결과물인 것이다. 비릴리오에게 모든 대중매체는 '전쟁의 정신'에서 탄생한 '지각 조직(혹은 조작) 기술'에 다름 아니다. 그의 섬뜩한 통찰은 다음 주장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표상 없는 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심리적 신비화를 수반하지 않는 최첨단 무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저절로 한 가지 당면한 문제가 떠오른다. 바로 여전히 논란이 끊이지 않는 사드(THAAD)다. 사드는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missile)', 그러니까 적이 발사한 미사일을 지상 40~150㎞ 사이의 높은 상공에서 방어 미사일을 발사해 요격하는 '대 미사일 방어체계'를 뜻한다. 필자는 사드의 세부 기술이나 요격의 정확성을 따질 의도도 없고, 이를 위한 전문지식도 없다. 필자는 다만, 비릴리오의 통찰에 기대어 사드에 대한 두 가지 의문을 생각해보려 한다. 사드는 대체 어떤 '전쟁의 정신'에서 탄생한 무기일까? 이어, 사드에 대한 대중들의 표상 속에는 어떤 신비화 혹은 절대화의 요소가 숨어있을까? 첫 번째 의문은 사드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 의문은 사드를 감싸고 있는 근거 없는 환상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의문은 무관한 것이 아니며, 서로 뗄 수 없이 맞물려 있다.

사드의 역사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91년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투입한 '패트리어트 방어 미사일'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보다 더 멀리는 1983년 레이건 대통령이 역설한 '전략방위구상(SDI)'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 전략방위구상은 대기권 바깥에서 위성, 레이저, 거울을 활용해 적의 미사일을 요격한다는, 문자 그대로 '스타워즈'식 구상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허위와 비현실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또한 페트리어트도 전쟁 당시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이라크의 스커드미사일을 막아내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30여년이 지났기 때문에, 페트리어트도 기술적으로 현저하게 개선됐을 것이며, 사드는 아마도 기술적 완성도가 더더욱 높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드의 역사적 기원을 고려한다면, 사드를 마치 '완벽한 방어체계'인 것처럼 맹신하는 것은 적절한 태도라 할 수 없다.

사드에 대한 환상과 이데올로기는 좀 더 심각하다. 수개월 째 논란을 거듭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여전히 사드를 단순한 양자택일의 문제로 생각한다. 사드 배치는 '안전이고 애국'인 반면, 사드 반대는 '위험이며 반국가'라는 식으로 말이다. 북한의 미사일 위협 앞에서 사드 배치는 분명 불가피하다. 거의 모든 국민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드를 어떤 신비한 마법처럼 여겨선 안 된다. 비릴리오의 말대로, 일단 첨단 무기에 대한 '심리적 신비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쟁과 무기로는 어떤 경우에도 참된 평화를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실현 가능한 해법을 냉정하게 찾는 일이 정말로 시급한 시점이다. 문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실현 가능한 해법 한 가지라도 합의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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