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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0이냐 1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조만수 충북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입력: 2017-04-27 18:00
[2017년 04월 28일자 22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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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0이냐 1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조만수 충북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또 다시 봄이 되었다." 유독 봄이면 이렇게 말하게 된다. 하긴 "또 다시 여름이 왔다"고 말하는 것보다 "또 다시 봄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모든 생명이 휴식하는 계절로부터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로의 이행은 해마다 겪는 것이지만 항상 경이롭다.

봄은 종교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계절이다. 부활절과 석가탄신일처럼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계기들이 봄에 위치하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와 관련된 기념일 중에서 세속적으로 가장 중요한 날은 크리스마스이지만, 기독교라는 종교의 본질과 닿아있는 날은 부활절이다. 석가탄신일은 크리스마스처럼 성인의 탄생을 기리는 날이지만, 실제로 싯다르타라는 개인의 탄생 보다는 깨달음을 얻은 존재인 '부처'의 도래를 생각한다면, '부처님오신날'의 의미와 부활절의 의미가 무관하지 않게 느껴진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가장 고도의 정신적 체계이다.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죽음이라는 인간 조건의 극복에 있다. 이를 기독교나 불교에서는 구원 혹은 해탈이라 부른다. 그런데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의 상태란 무엇일까?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이 순환을 우리가 경이롭다고 했지만, 사실 겨울과 봄을, 죽음과 생명을 이원론적으로 나눠 생각하고 그것이 순차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라면,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에 불과하다. 죽음과 삶을 두 개의 반대의 명제로 제시하는 것, 그것은 비극의 세계이며, 이 비극의 세계에서는 "죽느냐 사는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햄릿의 세계이다. 구원, 해탈은 이 이분법을 극복한다. 종교적 사유 속에서는 "죽으면서 동시에 사는 것", 그것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죽음과 삶의 동시성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물리적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아니다. 죽은 존재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부활이라기 보다는 '좀비'의 상태에 가깝다. 죽음을 물리적으로 극복하고 삶을 연장하고 갱신하는 행위는 실상 좀비처럼 살아있는 죽음을 만든다. 관념과 상징을 물질로 대체할 때, 예수 혹은 부처가 좀비가 돼버리는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이를 우상이라 부를 것이다.

부활 혹은 해탈에 의한 죽음과 삶의 동시성의 구현은 죽음과 삶에 대한 기존 관념을 뒤엎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고린도전서에 따르면 예수는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한다. 이 말은 예수가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살아났다는 육신의 부활을 강조하기 보다는 삶이 죽음의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죽음 가운데 삶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살아있는 현재의 상태가 죄의 상태, 다시 말해서 죽음의 상태와 같은 것이며, 그것을 깨달을 때 더이상 살아있는 죽음이 아니라 진정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부활에 의한 생명 상태는 죽음과 삶을 모두 품고 있는 개념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를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표현한다. 색(色)이란 형태를 갖는 것, 현상의 세계이며, 그렇기에 햄릿식으로 말하면 '있는 것'(To Be), 즉 '사는 것'이다. 공(空)이란 '없는 것', '있지 않는 것'(Not to Be), 즉 '죽는 것'이다. 결국 햄릿의 도식으로 이해한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죽는 것과 사는 것은 같은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현상의 세계는 물질의 집적으로 이뤄진다. 즉 1로부터 시작해, 1이 합산돼 쌓여가는 숫자들의 세계다. 그러므로 결국 현상의 세계는 1의 세계다. 그런데 수학적으로 없음을 나타내는 숫자는 0이다. 0과 1이 함께 존재하는 세계가 디지털의 세계다. 그런데 함께 존재하는 것과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차라리 디지털의 세계는 햄릿의 세계와 닮았다. 다시 말해서 전류가 들어오지 않는 상태와 전류가 들어오는 상태를 확연하게 구분 짓는다. 0이냐 1이냐 그것이 문제다. 하지만 디지털의 세계는 햄릿처럼 그 둘의 양자 선택의 불가능성 때문에 파멸하지 않는다. 디지털의 세계는 영리하게 이렇게 구분된 두 가지를 함께 배치하며, 그 배치를 통해서 엄청난 물질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 세계는 가상의 세계조차도 물질화한다. 다시 말해서 없는 것조차도 있게 하는 세계이다. 알파고는 결국 아주 영리한, 하지만 육체를 지니지 않은 좀비다.

죽음 가운데서 삶을 만드는 것, 색과 공을 같게 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0의 개념이다. 그것은 없음이면서 동시에 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없기 때문에 물질적 속성을 갖지 않는다. 아니 없음으로써만 물질적 속성을 갖는다.

부활은, 해탈은 물질적 세계 속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것은 거창한 것 같지만 피어나는 꽃 속에서 놀라다가, 지고 없어지는 꽃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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