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593) 위생가설
적당한 불결함, 병 예방에 효과적
청결·위생에 대한 집착 경계해야
적당한 불결함, 병 예방에 효과적
청결·위생에 대한 집착 경계해야
A형 간염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2014년 1307명이었던 A형 간염 환자가 작년에는 4743명으로 늘어났다. 올해도 벌써 784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눈부신 경제 성장 덕분에 위생적으로 깨끗한 생활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던 20~40대 환자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고질적인 감염성 질병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힘겨운 노력이 오히려 젊은이들을 더욱 허약하게 만들어버린 셈이 돼버렸다는 뜻이다.
A형 간염은 환자의 배설물에 들어있는 바이러스로 오염된 손·물·음식을 통해 전파된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누구나 간염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특히 6세 이하 어린이의 경우에는 대부분 아무 증상이 나타나지 않거나 가벼운 증상으로 끝나버린다. 오히려 감염자의 몸속에서 면역작용을 하는 항체가 만들어져서 평생 A형 간염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실제로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거의 모든 사람들은 A형 간염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 간염 바이러스에 노출될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 20세 이후에 A형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20일 정도의 잠복기가 지나면 발열·근육통·구토와 함께 심한 황달 증세가 나타나고, 급성신부전이나 담낭염으로 발전하여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증상을 억제하는 대증요법이나 망가져 버린 간을 이식하는 방법 이외에는 뾰족한 치료법이 없다고 한다.
어릴 때 위생적으로 지나치게 깨끗한 생활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욱 심각한 위험에 노출되는 역설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괜한 억지가 아니다. 2015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50대 이상의 세대에서 A형 간염에 대한 항체 보균율은 97%를 넘었다. 50대 이상의 성인은 대부분은 어린 시절에 A형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위생 환경에 크게 개선된 후에 어린 시절을 보낸 30대의 보균율을 31%이고, 20대에서는 보균율이 12%에 지나지 않았다. 40대의 보균율을 80%였다. 우리 사회에 난처한 '위생 가설'(hygiene hypothesis)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1989년에 처음 제기된 위생 가설은 A형 간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천식이나 건초열과 같은 알러지나 일부 당뇨, 다발성 경화증, 우울증, 암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수렵채취 시대부터 인간과 함께 진화해왔던 '옛 친구'인 미생물들이 없어져 버리면서 우리의 면역 체계도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위생 역설'이라는 자극적인 표현도 사용하지만, 위생 가설이 우리에게 난처한 선택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의도적으로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을 일부러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만에 하나라도 치명적인 감염성 질병이나 고약한 알러지에 걸릴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다.
위생적인 생활환경이나 습관이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술잔을 돌리고, 손을 씻지 않는 고약하고 위험한 버릇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언제나 완벽하게 멸균된 환경에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나친 결벽증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혹시 평생을 멸균된 환경에서 살 수 있다면 또 모를 일이다. 인류의 건강과 수명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켜 준 현대의 보건·위생 기술을 탓할 이유도 없다. 갓난아이를 키우는 젊은 산모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상식이 있다. 아이를 일부러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키워야 할 이유는 없지만 아이를 언제나 완벽한 멸균 상태에서 키울 수도 없다. 필요 이상으로 청결과 위생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살균과 멸균만 강조하는 광고는 경계해야 한다. 무엇이나 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할 수도 있는 법이다. 손주를 사랑하는 할머니의 숟가락이 보약이 될 수도 있다.
이덕환 서강대 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 탄소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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