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X에 중독되면 짧은 시간 내 죽음
전신에 퍼진 잔류물은 찾기 어려워
전신에 퍼진 잔류물은 찾기 어려워
![[이덕환의 과학세상] (592) VX독살](http://contents.dt.co.kr/images/201703/2017030802101076650001[1].jpg "[이덕환의 과학세상] (592) VX독살")
낭인 신세였던 김정남이 혼잡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대낮에 독살당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말레이시아 정부의 수사 결과 발표가 2주일이나 늦어지면서 온갖 추측성 보도들이 쏟아졌다. 아직도 독살의 구체적인 방법이 확실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치명적인 VX를 사용했다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발표를 의심할 이유는 없다. 대량 살상용 화학무기의 생산·비축·사용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1993년의 국제적 합의는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독살은 새로운 살인의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낡고 잔인하고 비겁한 살인 방법이다. 독살에 사용하는 독극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복어의 독인 테트로도톡신, 피마자 씨앗에 들어있는 리신(ricin), 독버섯에서 채취하는 무스카린, 복숭아 씨앗에 들어있는 시안산(청산), 수은이 포함된 주사가 모두 독살의 수단이 된다. 굳이 독성이 더 강하거나 효과가 더 좋은 새로운 신종 독극물을 개발할 이유가 없다.
김정남의 독살에 사용됐다는 VX는 1950년대에 영국에서 개발된 유기인산 계열의 제초제였다. 그러나 인체와 생태 환경에 지나치게 강한 독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결국 영국군에 의해 '독성작용제 X'(Venomous agent X)라는 뜻의 'VX'라는 신경작용제(신경가스)로 알려지게 되었다. 피부를 통해 흡수되기도 하는 VX는 치사량이 10㎎ 수준인 맹독성 신경가스다.
VX가 피부를 통해 몸속으로 흡수되면 대표적인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분해를 차단해서 전신의 신경을 심각한 피로 상태에 빠뜨려 버린다. VX에 중독되면 근육경련·구토·흉통·동공축소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짧은 시간에 호흡과 심장박동이 불가능해져서 곧바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VX와 같은 치명적인 독극물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극미량이라도 몸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라도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된다. VX를 맨손으로 만진 사람도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사실을 무시한 공격 방법은 무모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극미량의 VX에 의한 중독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전신으로 퍼져버린 VX의 잔류물을 찾아내는 일은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세균(박테리아)이나 바이러스의 경우와 달리 VX와 같은 독극물은 몸속의 생리활성 물질과 화학적으로 반응하는 과정에서 다른 물질로 변환되어 버리기도 한다. 몸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평범한 물질로 변해버리면 독살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게 된다. 실제로 인류 역사에서 독살의 방법을 정확하게 밝혀낸 경우는 흔치 않다.
VX의 경우에는 몸속에서 분해되어 만들어지는 대사물질이 혈액에 남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도 그 흔적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다. 대사물질의 양이 많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1994년 일본의 옴 진리교 교도의 VX 공격으로 사망한 피해자의 혈액에서 대사물질을 찾아내기까지는 7개월이나 걸렸다.
VX를 말레이시아 현장에서 합성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어설픈 것이었다. 사실 VX를 굳이 살해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겉보기에 엔진 오일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VX 소량을 운반하는 일이 절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원료 물질을 섞어준다고 VX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합성에 필요한 시설이 없는 주거용 콘도에서 VX를 합성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독살 용의자 중에 화학 전문가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VX는 아무나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얼굴에서 VX가 합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황당하다. VX에 사용할 수 있는 원료물질도 함부로 만지기 어려운 독극물이다. VX의 합성반응이 원하는 만큼 신속하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용의자가 미리 해독제를 복용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SF 소설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북한이 UN의 화학무기금지협정(CWC)을 정면으로 위배했다는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모양이다. 적은 비용으로 쉽게 생산할 수 있는 화학무기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한 핵무기나 미사일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이덕환 서강대 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 탄소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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