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마다 '창조형 전략' 표방했지만 실패
R&D 투자 세계 1위… 사업화율은 '바닥'
관주도 출연연·외국 의존 연구등 역량 한계
'4차 산업혁명' 앞두고 글로벌 연계 중요
산-학-연 인적 교류 확대로 돌파구 마련
기술발전 따라갈 '민첩한 통치' 시스템 요구
R&D 투자 세계 1위… 사업화율은 '바닥'
관주도 출연연·외국 의존 연구등 역량 한계
'4차 산업혁명' 앞두고 글로벌 연계 중요
산-학-연 인적 교류 확대로 돌파구 마련
기술발전 따라갈 '민첩한 통치' 시스템 요구
■ 2017 리스타트 코리아
차세대 선도형 '혁신 생태계' 구축하라
대한민국의 성장 엔진이 멈춰가고 있다. 조선·해운·철강·석유화학 등 기존 주력 산업이 취약 산업으로 전락해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수출 견인차 구실을 하던 스마트폰과 자동차 역시 지난해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7' 조기 단종과 현대자동차의 해외 판매 부진으로 위기에 놓였다. 국내총생산(GDP)의 40%대를 차지하는 수출이 휘청이자 투자와 고용, 민간 소비가 모두 벼랑에 몰렸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사상 처음으로 3년 연속 2%대를 기록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현 상황이 단기적 위기가 아닌 구조적 위기라는 점에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선진국의 신고립주의 확산과 중국 등 경쟁국의 맹추격으로 대외 여건은 더 어려워질 전망이다. 안으로는 고령화와 생산성 정체로 잠재성장률마저 추락해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자율자동차와 드론,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바이오헬스, 신소재 등 어느 신산업에서도 자신 있게 신성장동력이라 부를 만한 분야가 없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선 선진국을 모방·추격하던 과거의 성장 공식과 결별하고 고도의 기술 혁신과 기업가 정신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새로운 국가 혁신 체재를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발 늦는 '빠른 추격자'="한국은 아직도 '빠른 추격자' 방식을 버리지 못했다."
지난해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에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연구개발(R&D)에 쓰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저자는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 직후 한국 정부는 인공지능(AI)에 2020년까지 1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며 "하나의 사례만으로 'AI가 미래'라고 결정해 버린 주먹구구식 대응"이라며 정부의 의사결정 방식을 꼬집었다. 네이처는 왜 기적에 가까운 고도성장을 견인하며 반도체와 스마트폰 등 세계 1등 상품을 탄생시킨 한국의 '빠른 추격자' 전략을 버려야 할 유산이라고 지적했을까.
당시 '알파고 쇼크'로 다급해진 정부는 대기업들의 출자를 받아 '지능정보기술연구원(AIRI)'을 설립했다. 외관상 '민간 주도 연구소'였지만 사실상 정부가 주도한 프로젝트였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아직 연구원도 갖추지 못한 연구소에 수백억원 규모의 정부 사업을 몰아주겠다고 발표하며 정치권과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후 AIRI는 '최순실 게이트'와 맞물려 대기업 출자와 관련한 외압설과 특혜 논란 등에 시달리며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의 미르재단'이라는 오명을 썼다. 정책 추진이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민간에선 이미 AI와 결합한 혁신적인 서비스 모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더는 추격형 전략에 머물러있는 정부의 정책 기획력과 실행 방안이 급변하는 기술과 시장 수요를 따라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은 2015년 산·학·연·정부·언론 분야 전문가 50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의 국가 혁신 시스템을 분석한 '전환기의 한국형 과학기술혁신 시스템'이란 보고서를 내놨다.
이 보고서에서 전문가들은 '추격형 성장 이후 정책 대안의 부재'를 개혁이 필요한 혁신 시스템 이슈 중 하나로 꼽았다.
보고서는 "지난 10년 넘게 추격형 성장의 한계를 넘기 위해 창조형 전략과 통합적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반박되거나 부정된 적이 없이 한국이 반드시 수용해야 할 대전제가 되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전략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안과 실천의 경로는 여전히 모호하며 거창한 이름의 부실한 정책, 즉 구호만 화려할 뿐 새로운 전략이라고 제시되는 정책 의 내용, 전파력, 실천력 모두가 부실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권마다 창조형 전략을 표방했지만, 실제 실행 프로세스는 여전히 개발 시대 추격형 방식의 기획과 실천 방식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다. 보고서는 이어 "공급자 중심적 경향과 부처 간 정책사업 중복은 정부가 시장을 선도한다는 개발시대적 전재와 부처별 예산과 사업 경쟁의 관행에서 비롯된다"며 "개발시대 속도전을 중시하던 정책 실행의 패턴은 이해당사자 간 합의, 이해관계 조정, 협상 등의 절차적 과정을 경시하는 관행을 지속시킨다"고 지적했다.
◇'밑 빠진 독'이 된 낡은 혁신 시스템=외형적으로 보면 한국의 기술 혁신 역량은 세계 최상위에 속한다. 2015년 한국의 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은 4.23%로 세계 1위고, 기업의 R&D 비용은 50조원을 돌파했다. 연구자 수는 인구 1만 명당 68.5명, 경제활동인구 1000명당 13명으로, 이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국, 일본, 유럽에 동시에 출원돼 특허의 국제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삼극특허 수는 미국, 일본, 독일 다음으로 세계 4위를 차지했으며, 블룸버그가 발표한 '2017 혁신지수'에서는 4년 연속 세계 1위에 올랐다.
하지만 R&D 투자는 크게 늘려도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코리안 패러독스' 논란은 십 수년간 한국 과학기술계를 고질병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경제 보고서'를 통해 "연구 성과의 양에 비해 경제 성장에 실제로 기여하는 바는 기대 이하"라며 "혁신 제도의 구조적 취약성으로 인해 높은 R&D 투자의 효과도 충분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마중물을 쏟아부어도 샘물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낡은 혁신 시스템에 있다고 지적한다. 기본적으로 추격형 전략은 원천기술과 핵심부품, 설비 등을 전적으로 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과 연구소는 응용 분야에만 집중하다 고부가가치 핵심기술과 창의적 개념설계 역량을 쌓을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다.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기 어려운 연구 지원 시스템과 문화도 한몫 한다. 지난 50년간 정부의 산업 발전 목표에 발맞춰 움직여온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은 권위적·수직적 지배구조 안에서 경직된 형태로 운영돼 창의적 혁신 역량을 키울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2000년대 이후 기술 혁신을 내세우며 수용할 그릇도 갖추지 못하고 규모만 늘어난 R&D 투자는 기형적 관리 수요를 낳았고, 까다로운 평가 기준에 맞추기 위한 '답이 정해진 연구', '연구를 위한 연구'를 양산했다. R&D 성공률은 90%가 훌쩍 넘지만, 사업화율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숫자만 늘어난 특허는 기업들의 외면을 받아 기술무역 수지는 여전히 만성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외국의 특허를 활용해 제품과 서비스를 제조하는 추격형 전략으로 성장한 우리 산업 구조상 대기업의 수출이 늘어날수록 기술 로열티 지급이 함께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추격형 혁신의 그림자는 R&D 영역 외에도 드리웠다. 오랜 기간 정부가 기술 개발에 대한 대규모 정책 자금 투입을 주도하다 보니 민간의 기술 금융 시스템은 기술 혁신의 투자 수익성이나 성과를 검토하는 능력을 축적할 기회가 없었다. 민간의 기술평가 기반이 취약하다 보니 가장 역동적으로 혁신을 수혈할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와 엑셀러레이팅 기능이 향상하지 못했다. 인력 양성 측면에서도 도입한 기술을 소화하거나 개량하는 데 유리한 인력을 선호하다 보니, 창의력이나 문제 정의 역량을 키우기보다는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 교육의 초점이 맞춰졌다.
◇4차 산업혁명 앞두고 혁신 체제 손볼 '골든타임'=세계적 경기침체와 저성장 국면을 벗어나기 위해선 4차 산업혁명을 반드시 재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이미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을 필두로 AI 비서와 자율차, 지능형 로봇 등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가운데, 서둘러 혁신 시스템을 정비하지 못한다면 우리 경제의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커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주요 먹거리로 떠오른 스마트팩토리와 스마트시티 등 기존 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릴 융복합 경쟁력 확보는 무엇보다 시급한 사안이다. 이를 위해선 특히 국내 환경에 안주하는 '갈라파고스'적 혁신 경향을 탈피하고 글로벌 과학·혁신 네트워크와의 연계를 확대하는 것이 과제다. 이에 대해 OECD는 "기업들이 해외 연구소나 대학들과 더 잘 협업할 수 있도록 R&D 투자 장벽을 완화하고 서로 고립되어 있는 대학과 기업, 정부 출연연구소 간의 인적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혁신 속도를 높이기 위해선 창업과 작은 기업 중심으로 아이디어와 신기술·서비스를 발 빠르게 사업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대기업은 혁신적인 기술 인수해 자본력과 마케팅 역량을 더해 세계적인 성과로 키우는 산업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장기적으로 기술 혁신 생태계가 자리를 잡기 위해선 과학기술 분야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국가적 혁신이 함께 동반돼야 한다. 미국 오바마 정부의 경우 2009년 발표한 '미국 이노베이션 전략'에 근거해 과학기술과 제조업 혁신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정부가 먼저 스스로 혁신을 단행하겠다는 내용을 혁신 전략의 정책과제로 명시했다. 이를 위해 기업과 민간단체, 컨설팅 업체 등으로부터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했으며, 혁신을 위한 제도적 환경 마련, 혁신가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에 대한 투자 등 폭넓은 정책을 추진했다.특히 4차 산업혁명 기술의 경우 사회·경제적 파급력이 매우 폭넓고 깊게 펼쳐질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혁신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기술 발전을 지원할 수 있는 '민첩한 통치' 시스템 구축이 요구된다.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WEF) 회장은 저서 '제4차 산업혁명'에서 정부의 역할에 대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것은 많은 정책을 더욱 빨리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회복력 있는 체제를 생산할 수 있는 규제와 법 제정의 생태계 조성"이라며 "혁신이 등장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여유를 만들 수 있는 선견지명을 융합해 현재의 상태보다 더욱 생산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남도영기자 namdo0@dt.co.kr
[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