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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산책] 4차 산업혁명, `다양성`서 꽃핀다

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입력: 2017-01-02 17:00
[2017년 01월 03일자 22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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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산책] 4차 산업혁명, `다양성`서 꽃핀다
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19세기 중반 무렵 아일랜드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감자마름병에 의한 감자 기근으로 인해 근 5년 간 아일랜드 주민 800만 명 중 150만 명 정도가 사망하였던 것이다. 피해를 줄이기 위한 시도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 기간 동안 기근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했다. 핵심적인 이유는 단일재배에 가까운 감자 생산방식에 있었다. 선택과 집중으로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그와 같은 경작 방식이 도입된 것이었지만, 그 방식은 또한 병충해에 매우 취약한 구조적 결함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감자마름병은 감자만이 아닌 아일랜드 전체가 앓을 수밖에 없는 병(病)이 됐다.

기술문화(technological culture)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아일랜드의 단일재배(monoculture) 사례는 그저 과거의 슬픈 역사로만 보일 수는 없을 듯하다. 기술문화 역시 하나의 단일문화(monoculture)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문화의 초기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과학적 경영기법으로 알려진 테일러시스템이다. 테일러시스템은 기계에 적용되던 효율성 개념을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했으며, 그 까닭에 인간의 노동은 이 체계 내에서 마치 기계처럼 간주됐다. 인간의 노동은 기계적 메커니즘으로 이해됐으며, 그러한 노동 방식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상정됐다. 문제는 이렇게 기계적 메커니즘으로 이해된 노동이 결코 기계를 능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계의 우위성 속에서 인간의 노동, 특히 인간의 육체노동은 기계에 의해 대체되기 시작했다.

러다이트 운동과 같은 저항과 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육체노동의 대체는 인간의 물적 풍요에 기여하면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고착화됐다. 어떤 면에서 육체노동의 대체는 고단한 육체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보다 자유롭게 그의 정신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로도 해석됐다. 비록 그 대체가 가속되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기초로 한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적 노동은 기계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었다.

현재의 변화 속에서 그 믿음은 아쉽게도 그저 믿음으로만 남을 공산이 클 듯하다. 기술문화의 새로운 형태로서 등장한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인간의 정신노동 역시 대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는 클라우스 슈밥은 그의 책 '4차 산업혁명'에서 기계학습 전문가 마이클 오스본의 말을 빌려, 이와 같은 직업 대체의 원인에 기술적 요인뿐 아니라 기업이 그간 추구해 온 업무의 단순화 또한 포함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단순화의 결과, 업무가 명확하게 정의되고, 이로써 업무에 대한 모니터링과 데이터 수준이 높아져, 업무 수행에 필요한 자동화 알고리즘 설계가 더욱 용이해진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실제 진단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IBM의 왓슨(Watson)처럼, 의사와 약사 등 고도의 전문 직종 역시도 대체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전문 영역의 기술 대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있어 육체적, 정신적 노동영역 모두에서 인간 직업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기술문화가 보여주는 이와 같은 특징들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이 기술적 특성에 따라 규정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의 기술문화는 19세기 중반의 아일랜드와 많이 닮아 있는 듯 보인다. 마치 한 회사에 여러 부서가 있는 것처럼, 인간 삶이 그 보임새로는 다양하지만, 정작 그 삶 모두 기술의 전제(專制) 속에 놓여 있을 따름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만일 아일랜드에서 감자 외에 그들이 식용으로 삼을 수 있는 또 다른 작물들을 재배(polyculture)했다면, 그와 같은 엄청난 희생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이와 마찬가지의 가정을 우리는 우리의 삶에도 적용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다양한 삶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래서 기술의 전제가 아니라 기술이 인간의 문화적 다양성(polyculture)의 일원일 수 있다면, 우리는 기술의 전제 속에서 이해된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에서, 우리의 삶과 일을 모색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내다본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우려 속에서 미래에 존속할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저위험 직업군이 소개된 바 있다. 그 직업군에 속한 직업들이 대개 기계적으로 대체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저위험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직업들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직업군의 폭이 좁다는 점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사실 그 속에서는 우리 중 일부만이 운신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미래의 사회 역시 일부가 아닌 우리가 살아야 하는 시대이기에, 새로운 기술문화의 미래는 보다 실질적인 차원에서 대비돼야 할 것이다. 이 대비를 위한 모든 활동의 전제는 '우리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삶'이며, 이것은 또한 인문학 연구의 오래된 기본 전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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