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S 유전체교정연구단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논문 첫선
GMO기술과 달리 자체 유전자 일부만 교정 위해성 없어
사람 유전체까지 교정… 혈우병 등 난치병 치료 길 열려
그래핀·줄기세포 등 다양한 기초과학 새 산업 창출 기대
GMO기술과 달리 자체 유전자 일부만 교정 위해성 없어
사람 유전체까지 교정… 혈우병 등 난치병 치료 길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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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
<2부> (15·끝) 미래 50년, 다시 과학기술로
"노벨상을 받고 싶은 사람은 오지 마라. 우리는 국가와 산업계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해야 한다."
1966년 국내 첫 과학기술 종합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가 설립될 당시, 최형섭 초대 소장은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과학기술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아직 과학기술 불모지나 다름 없었고, 연구소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이들의 힘이 절실했다. 하지만 최 소장은 좋은 조건을 제시하긴커녕, 원하는 연구를 못 할지 모른다고 먼저 못을 박았다.
KIST는 월남전 파병 대가로 미국 원조를 받아 지어졌다. 당장 원조로 배를 채우기보단 미래에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결단과 의지가 베어 있었다. 연구자들은 산업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공업화를 이끄는 게 임무였다. 다행히 가난한 나라의 부름에 재외 과학자 18명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먹고 살기' 위해 시작된 과학기술 연구는 지난 50년 동안 유례없는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서구 국가들이 18세기 산업혁명 때부터 쌓아온 산업 기술을 단시간에 따라잡기 위해 과학자들은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에서 피땀을 흘려가며 연구에 매달렸다. 과학기술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연구개발(R&D) 투자는 해마다 늘어갔다. 이미 국내총생산(GDP)에서 R&D가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최근 연구성과가 예전 같지 않는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더는 선진 기술을 빠르게 따라잡는 '빠른 추격자'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 뒤에서는 중국과 인도 등 신흥국들이 기술 격차를 바짝 좁혀 온다. 그동안 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조선과 철강, 전자 산업 등은 벼랑 끝에 몰렸다.
전문가들은 이제 우리나라도 새로운 시장을 이끄는 '선도자'로 변해야 하며, 이를 위해 '기초'부터 다시 쌓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두철 기초과학연구원 원장은 "기초과학 없는 과학기술은 사상누각"이라며 "50년 전에는 어쩔 수 없이 순서를 바꿔 경제 발전을 위한 과학기술을 먼저 연구했지만, 이제는 초심으로 돌아가 기초과학을 기반으로 한 과학기술, 산업기술을 발전시켜야 선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20년 넘게 파온 우물에 드디어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0∼20년 후면 이 우물로 먹고사는 사람이 삼성 직원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다."
지난 21일 서울대학교에서 만난 김진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은 이렇게 말하며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 발행하는 기술 잡지 'MIT테크놀로지리뷰'를 내밀었다. 이 잡지는 매년 선정하는 '미래를 바꿀 10대 기술'로 올해 '식물 유전자 교정' 기술을 소개했다. 가뭄에 강한 보리, 곰팡이에 강한 밀, 수확량을 늘린 쌀 등 '유전자 가위'로 교정한 다양한 작물들이 한국을 비롯한 미국, 영국, 중국 등 전 세계 연구소 온실에서 발아하고 있어 5∼10년 후면 소비자들의 식탁에 오를 전망이다.
유전자 가위는 생물의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DNA 일부를 잘라내거나 갈아 끼우는 교정기술을 말한다. 김 단장은 2013년 3세대 유전자 가위 기술인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유전체 교정 사례 논문을 처음 발표했다. 같은 해 미국에서 4개 연구팀이 각각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사례를 발표했고, 2년 만에 이 기술을 이용한 논문이 수백 건씩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지난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가장 혁신적인 기술 성과로 꼽으며 '크리스퍼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언급했다.
김 단장이 이끄는 연구단은 지난해 이 기술을 활용해 벼와 상추 유전자 교정에 성공했다. 유전자 가위는 이전까지 품종 개량에 쓰이던 유전자재조합(GMO) 기술과 달리 외부 유전물질을 전혀 섞지 않고 자체 유전자 일부만 교정한다. 이 때문에 유전자를 재조합한 작물이 생태계를 교란하거나 사람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는 'GMO 논란'에서 자유롭다. 이미 미국 농무부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유전자를 교정한 버섯에 대해 GMO 규제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다. 유전자 가위는 무작위로 변이를 일으켜 원하는 종자를 골라내는 고전적인 육종법보다도 훨씬 정확하고 빠르게 새로운 종자를 만들 수 있다. 농업의 미래를 바꾸고 식량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가능성을 연 것이다.
연구단은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식물뿐만 아니라 사람의 유전체를 교정해 혈우병 등 난치 유전병을 치료하거나, 동물에 적용해 근육량이 보통 돼지보다 20% 높은 '근육 강화 돼지'를 만드는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 초에는 신형 유전자 가위인 '크리스퍼 Cpf1'의 정확성을 최초로 입증하고 동물 유전자 교정에 성공하는 등 세계적으로 앞선 연구성과를 내놓고 있다.
김 단장은 "유전체교정이라는 새로운 실험 기법을 개선하고 발전시키며 다양한 분야에 확산시키는 것이 목표"라며 "이를 통해 생명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을 할 뿐 아니라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고 동식물의 유전체를 개량해 새로운 산업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자의 호기심이 산업 지도를 바꾼다= 크리스퍼는 세균이 천적인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갖고 있는 면역체계다. 바이러스의 침입을 받은 세균은 바이러스의 DNA를 잘게 잘라 그 조각을 자신의 DNA에 넣어 둔다. 이를 학술용어로 '크리스퍼'라고 부른다. 이 부분에서 작은 가이드 RNA가 만들어지고, 'Cas9'라는 단백질과 결합한다. 다시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가이드 RNA가 바이러스 DNA를 찾아내 결합하고, Cas9 단백질이 이를 절단해 바이러스 복제를 차단한다.
생명과학자들은 우연히 발견한 이 현상에 호기심을 느끼고 다른 생명체에 적용할 수 있을지 실험하다 유전자 가위를 개발했다. 처음부터 거창한 연구는 아니었다. 덴마크 요구르트 회사가 유산균이 바이러스 때문에 죽는 이유를 연구하다 초창기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 유전자 가위가 동물과 식물은 물론, 사람의 유전자도 마음대로 자를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자,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졌다.
크리스퍼 이전에도 1세대 '징크핑거'와 2세대 '탈렌' 유전자 가위가 있었지만, 만들기가 어렵고 가격이 비싸 널리 활용되지 못했다. 이에 비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저렴한 비용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특정 유전자를 절단할 뿐만 아니라 특정 염기서열을 바꾸거나 집어넣는 기법도 가능해졌다. 최근 미국과 중국에선 크리스퍼 가위를 이용한 난치병 치료제를 직접 인간에게 투여하는 임상시험도 앞두고 있다.
김 단장은 "새로운 치료제로 개발하거나 동물과 식물 등에 적용하는 등 무궁무진한 응용 가능성이 있다"며 "기초과학이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초과학은 과학자들의 순수한 호기심에서 시작하지만, 산업의 지형도를 바꿀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다만 실생활에 적용되기까지 오래 걸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100년 전 아인슈타인이 내놓은 대표적인 기초과학 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은 오늘날 내비게이션에서 만날 수 있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흐른다. 약 2만㎞ 상공에서 지구를 돌며 위치확인시스템(GPS) 신호를 보내는 위성의 시간은 지표면의 시간보다 느리게 흘러간다. 여기에 중력의 영향까지 받는다. 이런 속도와 중력효과를 상대성이론으로 바로잡아 주지 않는다면 차량 내비게이션은 순간 수백m의 오차를 낼 수 있다. 위치 정보가 정확하지 않으면 휴대전화와 기지국이 제때 신호를 주고받을 수 없어 스마트폰도 쓸 수 없다.
또 인터넷은 '신의 입자'로 불리는 힉스의 존재를 입증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나온 기술이고, 와이파이는 전파천문학에서 나온 기술이다. 200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알베르 페르와 독일의 페터 그륀베르크가 발견한 '거대자기저항(GMR)'은 컴퓨터 하드디스크에서 자료를 읽어 들이는 기술 혁신으로 이어졌고,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나카무라 슈지 교수의 청색 LED 연구는 기존 백열등, 형광등을 대체하는 LED 산업을 일으켰다.
앞으로도 유전자 가위를 비롯해 그래핀, 줄기세포 등 다양한 기초과학들이 새로운 산업과 시장을 만들어 낼 전망이다. 특히 최근 과학기술 발전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기초와 응용, 개발 연구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어 기초과학이 실제 생활에 변화를 일으키는 속도는 훨씬 빨라질 전망이다.
김 단장은 "생명과학 분야는 이미 기초와 응용과학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새로운 기술이 곧바로 산업 혁신에 응용된다"며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을 철저히 나누는 것은 점차 무의미한 전략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 장기·대형·집단 연구로 변해가는 기초과학= 보통 과학적 발견의 순간을 상상하면 목욕탕에서 밀도 측정법을 발견하고 "유레카('알아냈다'는 뜻의 그리스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나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했다는 뉴턴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실제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극적인 순간보다는 지난한 실험의 반복이 대부분이다.
연구자들은 자신이 생각한 이론이 맞는지, 어떤 분야에 적용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실험으로 입증해야 한다. 이론이나 실험법 하나를 입증하기까지 몇 년씩 걸리는 게 예사다.
허준호 IBS 유전체교정연구단 크리스퍼 개발팀장은 "기초과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기보단 문제 자체를 찾는 과정"이라며 "대부분 시간이 할 수 있는 일보다는 할 수 없는 일을 확인하는 데 쓰인다"고 말했다.
유전자 가위의 경우에도 원하는 유전자를 정확히 잘라 내는지, 잘린 유전자가 실제로 반응을 나타내는지, 다른 부작용은 없는지 반복된 실험으로 입증해야 한다. 먼저 유전자가 들어있는 세포와 유전자 가위를 생리식염수 등과 함께 섞고 2~3일 정도 기다린다. 유전자는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유전자 증폭기술인 PCR(중합효소 연쇄반응) 검사를 통해 원하는 유전자가 잘렸는지 확인한다. 확인된 유전자는 세포에 넣어 배양하면서 이상이 없는지 관찰한다. 3세대 유전자 가위가 나오기 전까진 이 과정에만 3년 정도가 걸렸다. 지금은 크리스퍼 가위를 이용해 3∼6개월이면 가능하다. 세포에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면 동물실험을 시작한다. 동물실험으로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선 번식이 빠르다는 쥐를 이용해도 최소 2년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확신이 없다면 시작조차 하기 어렵다.
허 팀장은 "한 단계라도 실험 과정에 실수가 있으면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개인의 연구 인생을 걸고 실험을 한다"며 "믿음을 갖고 경험과 확률에 기대 끊임없이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이 점차 복잡해지면서 실험실에서 한두 명의 힘만으로 연구하기 어려운 분야도 늘고 있다. 유전체교정연구단만 해도 생물, 화학, 의학, 수의학, 식물학은 물론 유전자 분석 자료 등 대규모 실험 데이터를 분석하고 처리하기 위한 컴퓨터 공학 전공자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 연구원 60여 명이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연구가 대형화되면서 연구비도 천문학적으로 커진다.
◇ IBS, 26개 연구단 꾸려 대규모 투자= 기초과학 연구 패러다임이 장기·대형·집단 연구로 변해가면서 정부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2011년 기초과학연구원(IBS)을 설립했다. IBS는 연구단장 한 사람이 기간에 상관없이 자율적으로 연구비를 책정하고 연구단을 꾸려 운영한다. 연구의 자율성과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연구 주제도 정부 정책 위주의 '톱다운(하향식)' 방식이 아닌 연구자 중심의 '바텀업(상향식)' 방식으로 운영한다. 현재 26개 연구단이 꾸려졌으며, 앞으로 연구단을 50개까지 늘릴 계획이다. 연구단들이 모여 연구를 진행할 본원 건물도 지난달 착공했다. 총사업비 6500억원을 투입해 1, 2 단계로 나눠 2021년까지 건설한다.
김두철 원장은 "기초과학 연구는 누가 하느냐에 따라 효율이 다르기 때문에 우수한 연구자에게 충분한 연구비를 주고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연구를 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라며 "그래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씨를 1000개 뿌리면 1∼2개 싹이 난다는 심정으로 씨앗 하나 하나에서 무엇이 나올지 기대하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어떤 성과가 나올지 기대하고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IBS는 최근 네이처출판그룹이 발표한 '2016 네이처 인덱스'에서 국내 연구기관 1위를 차지하는 등 상승세를 타고 있다. 네이처 인덱스는 전 세계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 국가에 점수를 주고 순위를 매긴 지표다. IBS는 조사 기관 500개 중 지난해보다 147 계단 올라간 251위를 기록했고, 특히 피인용 상위 1% 논문 비중이 5.9%로 다른 국내외 연구기관과 비교해 높은 것으로 나타나 질적으로 우수한 성과를 보였다.
IBS는 기초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자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영 사이언티스트 펠로십(YSF)'을 마련해 올해 첫 번째 선발을 진행하고 있다. YSF는 젊은 과학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수행할 기회를 준다. 선발된 연구자는 처음 3년 동안 임용되고, 심의를 통해 2년 추가 연장이 가능하다. 분야에 따라 1억5000만∼3억원까지 연구비가 지원된다. 자신이 세운 독창적인 연구계획에 따라 자유롭게 소규모 연구그룹을 구성해 자율적으로 연구활동을 펼칠 수 있다.
김두철 원장은 "우리나라가 기초과학에 얼마나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정책적 연구가 더 필요하겠지만, 기초과학은 국가에서 지원할 수밖에 없고 긴 안목으로 봤을 때 결국 국가를 위한 투자이기 때문에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며 "IBS를 통해 전 세계 과학자들이 한국에서 연구해보고 싶다며 모여들고, 이들과 커뮤니티를 이뤄 신나게 연구하는 분위기가 되다 보면 제대로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문화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남도영기자 namdo0@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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